전북 문화예술계의 현재와 전북민예총의 위치
20110417 유대수(사)문화연구창 대표)
1. 에피소드
“젊은 시절 뮤지컬 배우와 스태프로 일할 때, 은행에서 직업이 분명치 않다고 카드 발급을 거부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예술가는 다른 직업인과 달리 미래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최근 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뒤풀이에서 후배 배우가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다’는 말을 했다. 직업 예술인 역시 4대 보험 등 다른 직업인들과 비슷한 수준의 복지가 보장돼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술인복지법 제정이 시급하다”(연극배우 박정자)
위 인용문은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2011년 문화예술분야 정책현장 업무보고 및 토론회>에서 예술생태계 활성화 방안에 관한 토론에 참여한 패널들의 견해다.1) 예술 분야 전반의 현황과 문제의식을 더 많이 거론했으리라 짐작하지만, 우선 ‘예술생태계’라는 주제와 기사에 실린 일단의 언급만으로도 예술계와 예술인의 상황을 염려하는 그 마음에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이러한 토론을 통해 제시되고 정비될 국가 중심의 제도와 정책이 예술 활동의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또 ‘사용’해야 할 사회적 합의와 토대가 더 많이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예술‘계’가 그려내는 내적 문맥에 따른 지형도가 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구조와 의견 전달방식이 빈번하게 발생할 좀 더 자유롭고 확장된 장은 많아져야만 하고 그렇게 파악된 현상들은 현재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제도화되고 정책화되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지역’이라고 호명 받는 곳의 예술생태계 점수는 전국 평균을 밑돌고도 남을 테니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아야만 할 일임이 분명하다.
전북의 문화축이 흔들리고 있다. 개막을 5개월 앞둔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의 인재난, 전북문화재단의 지지부진한 출범 준비, 오락가락하는 전북도립문학관 개관, 전주문화재단의 사무국장 채용 오리무중…. 전라북도와 전주시는 "인재가 없다" "다른 일로 신경 쓸 게 많다" "여론 수렴을 거쳐 재검토 하겠다"고 미루다가 몇 달을 허비했다. 도내 문화예술인들은 이를 두고 "(전북도와 전주시가) 정작 무엇을 했나"라고 되묻고 있다.
(중략) 이에 대해 전북도와 전주시는 상반기 내에 약속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지역 문화계는 "(전북도와 전주시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늦어지고 있다는 핑계를 대기 보다는 각종 현안에 방점을 찍을 때"라고 일갈하고 있다.2)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기사의 내용은 우선 전북도와 전주시의 당면과제 몇 가지만을 거론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전북문화계 전체의 난맥상을 우려하는 점에 대해 나는 독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동의한다. 다만 ‘문화축이 흔들리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문화계가 혼란스럽다’는 쪽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흔들리거나 혼란스럽거나 간에 그런 현상들의 원점이 문화계의 역할 또는 지자체의 책임 중 어느 한 쪽에만 쏠려 있다기보다는 바로 그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과정’의 지점에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도내 문화예술인들이 “정작 무엇을 했나"라고 되묻거나 지역 문화계가 ”각종 현안에 방점을 찍을 때"라고 일갈하면서 전북도와 전주시를 몰아붙이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건 매우 어색하고 생뚱맞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라감영·전주 4대문 복원 추진위원회가 선화당 복원을 전제로 한 구도청사·구도의회 건물 철거에 대해 논의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중략) 이와 함께 지자체가 정책 방향을 정해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역할론이 제시됐다. (중략) 반면 전북도와 전주시는 전라감영 복원이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사업인 데다 전문가 집단인 추진위에 많은 권한을 이임한 만큼 추진위가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3)
나는 이 기사를 ‘지자체 정부는 민간의 전문성에 기대 답을 구하고자 하는데 엄선된 전문가 집단은 행정이 방향을 세워 추진하라고 되넘기는’ 식이라고 읽었다. 물론 전말이 생략된 탓이니 그 때 회의장에서야 행간의 숨은 사연들이 있었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혐의는 남는다. 구도청사 부지 활용방안에 대한 갑론을박이 꽤 오래 되었음을 알고 있으며, 도와 시의 관계, 행정과 전문가 집단과 주민 사이, 비용과 경제성의 문제 등 산적한 시비가 적지 않게 쌓여 있음을 또한 안다. 공동선을 합의해 내는 과정에 모두가 지치거나 지루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익과 사변을 위함이 아닌 바에야, 결국 최선을 다해 답을 정하고 시민사회의 이해를 구하며 행정에 ‘요구’해야 하는 입장은 바로 전문가 집단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칫 정책의 질을 담보하기 어려운 우회나 방기를 자임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전북 문화예술계의 현재와 전북민예총
2010년을 넘어서며 신년을 맞이하기까지 전북 문화예술계는 그 자체 건강 상태에 대해 꾸준히 염려하는 분위기를 이어 왔다. 비록 집중력 있는 논의의 장을 만들어내지 못한 미숙함이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 분위기가 점차 무거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최근 '문화축이 흔들린다‘는 과감한 표현까지 언론에 등장할 정도면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 염려의 정체는 예전과 달리, 점차적으로, 문화정책의 결정과 실행에 있어 행정의 일방 드라이브가 과도하여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소위 ‘공무원식’ 해결방식이 넘쳐남으로 인해 문화예술계의 의사표현이 소용없는 메아리가 되거나 불가능한 정도가 된 게 아니냐는 자조적인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자체는 복잡한 정책구조의 나열과 숫자의 포물선으로 문화예술 분야 투자의 경제성을 자랑하면서 이미 많이 ‘퍼’주고 있는데 왜 느끼지 못하느냐고 하지만, 별다른 소통 창구 하나 없이 자생의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이 생태계의 소속자들은 처우 개선이 필요한 ‘저소득층’으로 분류되어 한숨만 내쉴 뿐이다.
대형 국책사업과 시장 우선의 지자체 현안에 가려 문화예술이라고 어디 발 얹을 자리 비좁기만 한 현실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체감하는 것은 마지못해 끌려 다니며 간신히 버티는 일조차도 버거운 문화예술 ‘생태’계의 현장 온도다. 문제는 문화예술 생태계에 대한 현실 인식과 개선의 필요성을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발의와 주장, 선도와 입안에 선뜻 나서는 ‘주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제도와 정책의 빈약함과 관료 행정의 소홀함을 탓하기 이전에 문화예술계가 먼저 무엇을 어떻게 짚어야 할 지, 어떤 종류의 힘과 무기를 갖춰야 할지 그 갈래를 다듬는 일이 우선 필요한 과제가 아닌가 한다. 그 맨 앞자리에 전북민예총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전북민예총은 현재 어디에 있는가. 지자체의 영악과 안일에 대응하여 창의와 진일보의 문화정책을 논하고, 예술 생산과 문화 복지의 정당한 지원구조를 위한 열린 소통창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전북민예총이 서 있어야 할 위치를 확인하고 몸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을 위해 에피소드가 장황해진 감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글의 요지는 전북민예총의 현재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구석구석 살펴 빠른 시일 안에 처방전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3. 작은 것부터 천천히 풀어야 하는 몇 가지4)
전북민예총의 현재를 돌아보자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북 문화예술계의 절반을 지탱한다고 자부하는 태도만큼이나 예술생태계의 활성화는 물론 문화예술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에 작지만 한 걸음이라도 접근해야 하는 필요와 노력의 자세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좀 무게 잡고 말하자면, 왜 전북민예총이라는 조직-단체-공동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인지, 과연 없으면 안 되는 영역인지 먼저 우리 자신에게 설득되어야 한다. 또한 전북민예총의 현실을 문자 그대로 사실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집단의 준거가 되어 준 ‘민족예술’의 함의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게 되었다는 내외부 환경의 변화도 한 몫하고 있는 점도 인정했으면 한다. 그러므로 지역문화와 예술생산의 내일을 위한 숙고의 몸부림이, 적어도 내부에서 먼저 솟아나지 않는다면 지자체 문화정책에의 개입은 고사하고 집단의 자기 당위성마저도 의심하게 될 처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어진 과제가 난해하다. 대안-타당성-방안을 검토하고 모색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그렇게 검토되고 모색될 어떤 ‘방법-제안-문맥-단어들’을 생산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과 그를 둘러 싼 환경-구조(심지어는 ‘사람’까지도)를 밑바닥부터 개념화하고 합의하고 정리정돈하고 올라와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치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라는 질문인 셈인데, 그보다 앞서 “이제껏 어떻게 해왔는가”를 먼저 말해야 하고 그 이전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먼저 느껴야 순서가 맞을 것이다. 한 발 더 나간다면 그 앞에 “민예총은 무엇이고, 왜 거기에 몸담으려고 하는가(그냥 적(籍)만 두거나, 나서서 일하거나 간에)”에 대한 대화가 먼저 필요하기도 하다. 그간 전북민예총은 이런 식의 논법-대화-토론-논쟁을 좀 더 많이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공간-장의 마련에 노력을 게을리 했다. 그러니 오늘에 당면해서야 “내(우리)가 왜 여기 서 있지?”, “내(우리)가 지금 뭘 하는 거지?”라는 질문-회의가 드는 것이다. 그게 전북민예총의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한다.
혹자는 “예술만 잘하면 되지 글과 말이 무슨 소용이냐”고 타박하곤 한다. 이건 객관의 상대(사람이든, 제도든, 세계든)를 무시하거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주체의 입장만 강변될 수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이 말은 지극히 ‘개인-자아’만의 공간에서 일면 타당하지만 그 나머지 영역에서는 틀린 말이 될 소지가 크다. 예술이 자위-밀실의 인테리어가 아닌 다음에야 사회 또는 세계와 교접하지 않고 저 스스로 성립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이 좀 더 잘되고, 좀 더 잘 나누고, 좀 더 잘 즐기고, 예술을 만들고 공급하는 사람(들)과 예술을 즐기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최종적으로는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끈질긴 대화를 나눴어야 했다. 전북민예총을 기준으로 한다면 ‘예술, 그 중에서도 민족예술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를 줄기차게 논박해 왔어야 했다(또는 이전의 예술과 다른 예술). 그래야, 그 다음 과정에서 전북민예총이라는 집단의 정체성과 함께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할 일 등등이 눈앞에 떠오를 것이다. 어쨌든 전북민예총이 좀 더 좋은 조직-단체-공동체가 되고 싶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전북민예총이라는 이름으로 표상될 수 있는 어떤 것, 그걸 직조해내는 하나의 씨/날줄로서의 예술론, 그것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나(우리), 그리고 악수와 건배, 그 되짚음의 지난한 과정이 정작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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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동아일보, 2011-02-18 인터넷판. http://news.donga.com/Culture/Acad/3/0720/20110218/34922227/1
주2) 전북일보, 2011-03-22 인터넷판. http://www.jjan.kr/culture/others/default.asp?st=2&newsid=2011032219140301&dt=20110323
주3) 전북일보, 2011-03-30 인터넷판. http://www.jjan.kr/culture/treasure/default.asp?st=2&newsid=2011033020475501&dt=20110331
주4) 2010 전북민예총 임원세미나 발제글을 수정하여 재수록함, 졸고, 2010. 8. 이하 같은 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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