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던 판화가, 숲 속 바람 같은 삶을 추억함
곁에 있는 나무 한 그루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지용출, 그를 생각하면 착한 사람이었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언제든, 작은 것들에 눈길 주는 일이 행복하고 땅에서 나는 생명 그 질긴 역사를 가슴에 담을 줄 알았던, 숲 속 바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기대어 서서 세상 밖 맑은 바람 맞을 그런 나무, 숲, 흙의 냄새를 닮은, 지용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용출이 전라북도와 첫 인연을 맺은 게 1994년 봄. 왕십리 토박이라 자처하던 그가 처음 발 디딘 땅이 하필이면 곰소 갯벌이었습니다. 그렇게 낯선 곳 부안, 맘 붙일 친구 하나 없는 전주를 오가며 사는 동안 오직 그림 그리는 일만이,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의 대화만이 쉽게 마음 붙이기 힘든 객지 삶의 노고를 위안했을 것입니다. 그 탓이었을까요. 그의 그림들에는 딱 그 만큼씩의 절실함과 진지함이 묻어 있습니다. 부안 갯벌과 김제 붉은 땅의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 같은 것들을 읽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밭둑의 풀잎과 처마에 매달린 마늘과 곧 쓰러질 것 같은 고목 둥치 어림에도 스스럼없이 눈길을 바짝 들이미는, 그래서 아주 낯익은 삶의 풍경들, 충분히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의식처럼 고요한 그런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종 세상물정 모르는 질문을 하고, 그저 숫기 없이 머뭇거리는 사람 대하기에 그래서야 이 험난한 세상 어찌 살겠냐고 구박을 받던 때도 있었지만 확실히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작업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가 동양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필요한 일이라고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땅을 부쳐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뜻은 확고했습니다. 사십대 화가의 농사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뿌린 만큼 거두어지는 땅의 정직함이, 땀 흘려 생산하는 노동의 기쁨이 그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진하는 삶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하게 바라는 바였다는 글을 뒤늦게 챙겨 읽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행복한 노동’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사짓던 판화가, 행복한 노동으로 충만한 삶을 꾸렸던 판화가 故 지용출.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 낸 세상의 풍경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따스하게 말 걸어 주고 있으니 한편 다행이라 여깁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판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흙냄새와 사람을 사랑할 줄 알던 예술가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숲 속 바람 같은 삶을 살다 간 지용출의 유작과 유품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작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남은 사람들, 세상을 더 열심히 살아내고 망자의 못다 한 꿈을 미력이나마 간추려주는 일로 아픔을 대신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원(解寃), 故 지용출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의 마음과 마음 얹어 찾아주시기를 바랍니다.
<故 지용출 판화 유작전-곁에 있는 나무> 전시를 준비한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민족미술인협회, 유작전추진자문단, (사)문화연구창 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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