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던 판화가, 숲 속 바람 같은 삶을 추억함
유대수/(사)문화연구창 이사
20100727/전북참여연대 8월호 소식지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흙은 모든 삶을 포용하는 생명의 근원이며, 나무나 풀로, 때로는 들과 바람으로 변화한다. 그 땅에서 자란 들풀, 호박, 마늘은 분명 아름답다. 흙과 들풀, 호박, 마늘을 통해 시간과 역사 속의 변화와 불변을 표현하는 단색의 모노크롬이 주는 아름다움, 그것은 먹색이 주는 한국적 이미지와 정신성이다.
-지용출, 작가의 글-전라도 닷컴, 2002-02-01
곁에 있는 나무 한 그루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 일도 옛날처럼 아득합니다. 마지막 헤어지던 그 날, 잘 가라 내일 보자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못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봄 날 다 가도록 거두어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았습니다. 착한 사람이었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언제든, 작은 것들에 눈길 주는 일이 행복하고 땅에서 나는 생명 그 질긴 역사를 가슴에 담을 줄 알았던, 숲 속 바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기대어 서서 세상 밖 맑은 바람 맞을 그런 나무, 숲, 흙의 냄새를 닮은, 지용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억합니다.
그와의 첫 인연을 말하려면 1994년 봄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아내 김미경의 변산중학교 부임으로 전주생활을 시작하던 때입니다. 왕십리 토박이라 자처하던 그가 처음 발 디딘 땅이 하필이면 곰소 갯벌이었습니다. 그렇게 낯선 곳 부안, 맘 붙일 친구 하나 없는 전주를 오가며 사는 동안 오직 그림 그리는 일만이,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의 대화만이 쉽게 마음 붙이기 힘든 객지 삶의 노고를 위안했을 것입니다. 그 탓이었을까요. 그의 그림들에는 딱 그 만큼씩의 절실함과 진지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진지함에는 그러니까 부안 갯벌과 김제 붉은 땅의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 같은 것들을 읽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밭둑의 풀잎과 처마에 매달린 마늘과 곧 쓰러질 것 같은 고목 둥치 어림에도 스스럼없이 눈길을 바짝 들이미는, 그래서 아주 낯익은 삶의 풍경들, 그런 것들이 적절히 반죽되어져 있으면서 충분히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의식처럼 별로 번거롭게 떠벌리고 싶어 하지 않은, 고요한 그런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종 세상물정 모르는 질문을 하고, 그저 숫기 없이 머뭇거리는 사람 대하기에 그래서야 이 험난한 세상 어찌 살겠냐고 구박을 받던 때도 있었지만 확실히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작업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그와 아파트 지하를 얻어 3년여를 함께 창작하던 일 덕분에 나는 그의 삶에 대한 애정과 작품세계의 진중함을 충분히 새겨 흡입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학번으로,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학교생활을 했고 미술 작업 중에서도 같은 종류의 판화를 전공한 탓에, 삶의 환경조차 비슷하다고 느꼈던 나와 이상한 동질감으로 얽혀 속 깊은 대화를 나누던 때였습니다. 어쩌면 그 이전, 80년대 ‘운동권’ 시절을 함께 버티어 온 의식체계가, 민중미술에의 합의와 리얼리즘의 가치에 대한 동의가 그와 나를, 나아가 전북민미협의 모든 사람들을 식구처럼 한데 묶어 의지하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가 동양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필요한 일이라고 끄덕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땅을 부쳐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그 동안 쌓아 온 미술가로서의 성과가 아깝지 않느냐고 고개를 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습니다. 사십대 화가의 농사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뿌린 만큼 거두어지는 땅의 정직함이, 땀 흘려 생산하는 노동의 기쁨이 그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진하는 삶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하게 바라는 바였다는 글을 나는 뒤늦게 챙겨 읽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행복한 노동’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사를 행복한 노동이라고 한 것은 노동의 대가가 순수하고 정확하다는 뜻이다. 뿌린 만큼 거두어들인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오히려 나를 행복하게 했다. (중략)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는 삶의 충실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농사일에는 어떠한 일보다 상위개념이라는 사치가 없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정직함만이 있다. 그것이 나는 가장 행복한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지용출, 농사는 예술, 나는 행복한 텃밭을 가꾼다, 문화저널 2010. 3월호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만 남겨주고 떠난 그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착한 사람, 지용출이 바라 본 세상의 풍경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따스하게 말 걸어 주고 있으니 한편 다행이라 여깁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판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땀과 노동과 흙냄새와 사람을 사랑할 줄 알던 예술가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습니다. 나의 삶 역시 행복한 노동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면서요.
흙의 냄새, 흙의 마음을 담고자 난 작업실 주변의 흙을 넣어 종이를 만들었다. 우리의 종이 닥에 우리의 흙을 넣어 손으로 펴고, 햇볕에 말려 우리 땅에서 자란 우리의 풀처럼 그렇게 종이를 만들고 종이에 들풀을 찍었다.
-지용출, 작가의 글-전라도 닷컴, 2002-02-01
* 故 지용출은 1963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서울에서 자랐다. 1994년 전주에 정착한 후 두 아이를 두었으며 전북민미협 회원으로 활동했다. 10회의 개인전과 50여 차례의 그룹전에 참여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전북도립미술관, 수자원공사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추계예술대 판화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석사 취득, 철학과에서 박사를 수료했다. 2010년 5월 18일, 작업실에서 농지로 나가던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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