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립미술관 소장 판화전 리뷰
2010. 2. 1 ~ 2. 26 전라북도청 기획전시실
문화저널 3월호 문화시평
봄날, ‘판화’를 만난 몇 가지 생각
1. 오랜만의 나들이다. 겨울의 끝 그 속에 숨은 봄볕 한 자락 끄집어 당겨 온 몸에 칭칭 감아보았으면 하는 욕심 없지 않은 때다. 그런 기분으로 찾은 전시장. 지난 1년여를 바로 그 공간 어림으로 매일 출근하면서도 맑은 정신으로는 들여다 본 적 없던 곳이다. 차분한 여유로 오직 ‘미술’이 만들어주는 감동의 속살에게만 잠입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탓일까. 그러고 보면 괜스레 바쁘기만 한 생활의 틈바구니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잠시나마 등 떠밀리지 않고 앉아 쉴 수 있는 예술적 ‘관조’와 ‘침잠’의 지분을 남겨 놓았어야 했구나.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새삼스럽다.
2. 판화는 단순하다. 그게 일반의 선입견이(라고 알고 있)다. 단순함은 단조로움이기도 하려니와 투박함이자 명쾌함이기도 할 터. 그러므로 두 경우 모두 화려한 치장과 열정의 요란스러움을 연상시키기보다는 은근하거나 옹골지거나 고요하거나 딱 떨어지는 무엇이거나 또는 겉보기에 잘 알 수 없는 깊은 어떤 것이 숨어 있으리라는 예감을 먼저 던져준다. 화장기 없는 ‘생얼’의 보송보송한 탄력. 굳이 감추지 않는 진실의 여백 같은 것. 판화의 매력이란 게 거기 어디쯤 담겨 있지 싶다.
3. 전시장에 내걸린 판화작품들은 ‘모두 목판화’다. 한지와 나무라는 재료의 맛과 동일하게 화면의 맛 또한 부드럽다. 각진 선과 ‘칼맛’이라는 판화의 다른 속성을 잃지 않고 보여주기도 한다. 그간 미술관이 소장작품전을 여러 차례 치러온 바 어느 분들에게는 익숙하게 마주친 작품들도 눈에 띌 것이다. 편안한 익숙함. 그 덕분에 벽면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여유를 부리기도 하고 좀 더 천천히 걸으며 화면 여러 구석을 탐색할 수 있었다. 묵직한 맥락과 주제에 얹혀 여타 성질 다른 작품들과 나란히 감상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전시 상황에 비해 이렇게 비슷한 부류들만 솎아내어 단출한 감상의 편을 마련하는 일 또한 자주 있기를 바란다. 판화와 판화의 비교. 작가와 작가의 대조. 집중되는 소통의 편안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4.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 대비되는 분위기로 나눌 수 있겠다. 단순함과 복잡함. 투박함과 정교함. 그리고 한국과 중국(내몽골을 포함한). 이번 전시의 경우 단순함과 투박함은 한국 쪽에 속하고 복잡함과 정교함은 중국 쪽에 속한다. 물론 이런 구분이 두 나라의 판화적 속성을 대표하여 가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체적으로 그러하다. 홍선웅의 모악연작과 왕지엔루의 수인목판을 대조해 보면 그렇고 지용출의 고지도 형식을 차용한 채색 목판과 리추안캉의 작품이 드러내는 감성의 차이가 그렇다. 류연복과 장민지에는 비슷한 듯 다른 질감의 표현과 찍기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동조의 분위기는 있다. 구체적 형상성을 버리지 않으며 지역적(혹은 민족적) 정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 당대의 사회 현실과 역사적 실천에 눈 감지 않은 결과라 말해도 그리 과장된 허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5. 판화를 거론하려면 ‘기법’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초적으로 판화는 같은 그림을 복수로 생산하기 위한 기계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회화가 지닌 특질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왕지엔루의 작품은 특히 전통 수묵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려주고 있다. 수인판화라는 중국 전통의 기법 덕분이다. 홍선웅 역시 모시천에 먹으로 찍어 올린 수묵 기법을 활용한다. 다만 묘사의 정도가 다르고 판의 중첩이 다르며 칼의 쓰임이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지용출의 경우 단색으로 찍어 올린 화면에 수성안료로 채색을 입힌다. 한국적 전통의 쓰임새라고 할 만 하다. 나머지는 공통적으로 유성안료를 입힌 결과다.
6. 이번 전시는 결과적으로 목판화의 다양한 표현양식과 한・중간의 감성적 변별력을 보여주는 데 좋은 참조가 되었다. 동시에 아쉬운 점은 출품작이 ‘모두 목판화’라는 데 있다. 만약 목판화 고유의 특성을 설명해보려는 의도적인 기획과 배치였다면 ‘소장판화전’이라는 막연한 제목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하는 말이다. 아마도 미술관에서 여러 기법의 판화작품을 채 소장하지 못한 탓 일게다. 판화는 목판화뿐 아니라 다양한 재료와 기술적 표현들을 갖고 있다. 언젠가 좀 더 풍부한 기법과 표현양식을 겸비한 판화전시가 유치되고 또 소장되어 좁은 식견을 넓히는 문화적 혜택을 입기 바란다.
사족. 앞서 ‘모두 목판화’라고 굳이 강조한 이유는 이상하게도 전시장에 붙은 설명문과 캡션에 ‘석판화’라는 단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친절하게도 석판화 제작과정까지 설명하고 있다). 홍보 전단도 마찬가지며 심지어 언론 기사조차도 그렇다. 잘못됐다. ‘모두 목판화’가 맞다. 전시공간을 가벼이 여겼거나 작품 연구가 소홀한 탓이다. 또 있다. 한국 작가의 기법 소개는 구체적이고 다양하다. ‘목판위에 채색’, ‘먹판화’, ‘목판화’, ‘다색목판’이 그것이다. 반면 중국 작가의 기법 소개는 그저 ‘판화’일 뿐이다. 제작연도가 잘못 표기된 것도 있다. 미술관 홈페이지를 포함하여 작품 설명과 표기에 세심한 주의를 부탁한다.
유대수/홍익대학교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전북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신갤러리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큐레이터를 지내고 전라북도 홍보기획과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사)문화연구창 이사 및 문화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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