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術과 그림보기
유대수/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시기획자
전북대신문 기고 *이 글은 2003년 12월 08일자 새전북신문 문화비평에 쓰인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스스로 확신한다. 또는 겸연쩍은 미소를 날리며-그러나 전혀 부끄럽지는 않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몰라.”
간혹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축에도 이런 이들이 꽤 있는데, 사실 이 말은 다른 예술분야, 문화 영역에 대한 관심과 대화의 빈도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미술'에 대하여 얘기할 기회를 많이 가지지 않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클래식은 물론 대중가요를 포함하는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들을 줄 모른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다.
미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각이미지'를 다루는 예술적 표현형식의 하나이며, 시각 이미지란 일차적으로는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개인적 진술(아직은 합의되지 않은)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볼 줄 모른다'는 사람들의 겸연쩍은 고백이 이처럼 흔하고 자연스운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또는 교육이) 미술을 그저 바라보고 느끼며 자신의 삶의 조건들과 연결해 보는, 실재하는 일상의 차원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유토피아를 향한 모종의 예술-코드를 탐색해야만 한다는 식의, 정치적이며 동시에 고급하기까지 한 강박을 느끼게 하는 지점에 관련한 변명이지 싶다.
다른 말을 빌어 보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내 육체 앞에 놓여진 모든 것들을 일정한 조망, 퍼스펙티브(perspective)속에서 바라본다. 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자, 일정한 거리에서 그 대상을 소유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망의 거리, 퍼스펙티브를 확보했을 때 인간은 사유하고 깨닫고 인식한다. 그런 거리감이 결국 공간과 풍경에 대한 하나의 사고를 형성시켜준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사실 어려운 문제는 없다. 사유하고 깨닫고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로서 우리는 무언가를 보아야 한다는 말인데, 바라보는 일 그것이 그리도 어려울까? 앞서 '아직은 합의되지 않은 개인적 진술'이라고 한 말은, 결국 미술이 하나의 예술-문화적 성취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합의된’ 미술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대중의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합의란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바라보아 주는 일 이외에 그리 거창하고 복잡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단지 미술이라고 소개된 어느 대상-시각 이미지, 곧 ‘그림’을 보아주는 일뿐만이 아닌, 자신의 삶의 태도와 감정을 속이지 않는 감각의 발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 자신을, 곧 세계를 사유하고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태도로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에야 그리 인색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딱히 미술이라고 규정된 것들 뿐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이미 충분하게 넘쳐나는 시각이미지들을 정직하게-어쩌면 삐딱하게 들여다보아주는 일은 나아가 기왕에 통용되고 있는 미술을 이해하고 파헤치고 전복하기 위한 한 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이 개인적 사유든, 공공적 인식이든 먼저 괘념할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정직하게 바라봄으로써 얻어지는 자신의 시각의 정당성을 앞서서 훼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에, 많은 것들이 갑자기 미술이 되어줄 것이며 그렇게 미술은 넓어지고 숨통이 트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하라. 그러면 뭔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대화하라. 당신의 시각은 사유와 인식을 통제하는 억압의 장치보다 훨씬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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