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有餘)한 풍경의 전체를 보기
유대수/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시기획자
20071101_우진문화공간_지용출개인전 서문
“곁에 있는 나무라고... 전에 했던 나무들은 좀 크고, 무겁고 그랬는데 이번엔 작게 그렸어. 주변에 흔한 것들이지. 그냥 가볍게 하려고 했어. 가벼워졌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간단하다. 무뚝뚝하게 끊어 말하는 평소 버릇대로 사진자료를 건네며 함께 얹어준 설명이라는 게 꼭 이만큼이다. 그러니 화면을 대하는 우리 역시 작가가 혹여 어딘가에 숨겨놓았을지도 모르는 ‘내면의 그 무엇’을 찾아보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제법 진지한 모양새를 하며 무겁고 또 깊은 ‘삶과 예술’ 운운하지 않아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의 바람결에 잠시 머물다 간다고 한들 크게 문제될 일 아니라고 생각한다.
첫인상으로 말하자면 확실히 가벼워진 것 같긴 하다. 여기서 가볍다는 말은, 그래서 경망스럽다거나 무언가를 놓쳐 덜 그려낸, 그래서 가득 채우지 못했다거나 하는 식의 표현이 아니라 다가가기에 부담스럽지 않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작품을 마주 대하여 굳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있다면 큰 것과 작은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라는 명확한 대조로 자신의 변화된 태도를 설명하고자 한 작가의 언급이 과연 나무의 굵기나 채색의 밀도 같은 표면의 조건에만 국한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 될 것이다.
평소의 작풍 또한 그러하되 그려진-표현된 사물의 면에 비하여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간결한 풍경의 틈새를 가로지르는 빈 공간들의 한가로운 호흡으로 보아 짐작하자면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는 막상 화면에 드러난 형태-나무와 집들에 주목하기보다는 여백을, 풍경의 전체를 보게 될 것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 풀잎과 풀잎 사이를 지나가는 공기 말이다. 보이지 않지만 있음이 분명한 길과, 그려지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보이는 하늘과, 떠나기보다는 돌아오고 있음이 분명한 버스의 뒤꽁무니 어딘가를 흐르는 바람결의 자취, 넉넉한 전체로서의 풍경 말이다.
돌이켜보면 지용출의 작업 전반에 걸쳐 익숙한 ‘일상의 사물’이 중심으로 자리하지 않은 적 없다. 아니다. 낯선 ‘사물의 일상’을 바짝 들여다보고 또 그것들을 눈치 없이 화면의 중심에 끌어다놓기를 개의치 않았다. 부안 갯벌의 닻과 김제 밭둑의 마늘과 전주 인근을 둘러싼 고목이 한결같다. 그것이 그를 무겁게 했을 것이다. 진중한 의미와 지난한 역사를 갖추지 않고는 그림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시절을 지나오며, 갯벌과 밭둑길과 고목의 미세한 각질 하나하나에 삶과 예술의 가치를 실어내야 마땅하다고 여기며 잔뜩 힘이 들어간 붓질(각법 역시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이 간간하던 때를 떠올린다면, 이 전체로서의 풍경은 확실히 그의 말대로 ‘가벼워졌다고 하는 게 맞’다.
다만 그렇게 조망된 어느 숲속, 들판과 길목의 풍경이 무심해 보인다고 해서 그 속에 켜켜이 쌓이고 또 묻어나는 사연 없을 리 없다. 화면 어디에도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미 우리가 살아오고 또 살아 갈 시간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잊혀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점점 더 비워지고 넓어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삶과 예술이 치장해 온 부당한 무게와 너절한 담론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지용출의 화업(畵業)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림의 이력이 그의 살아 온 내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새삼스럽다.
그것이 그의 작업에 대한 접근을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주변에 흔한, ‘곁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서만으로도 충분히 선연하게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일이라고, 진리와 철학의 정체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데 동의한다. 그러니 나무와 집들의 간격만큼, 한벽루와 남천교 사이의 거리만큼 정도나 남아 있을 법한 과거의 이야기-미련의 무게는 그리 못 견디게 거슬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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