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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70610--지역에서 문화운동을 말하기(6월심포지엄)

by PrintStudio86 2017. 7. 25.

6월민주항쟁 20년 기념 심포지엄[전북, 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민주화의 과제] 문화운동분야 지정토론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말하기

유대수/전북민예총 정책위원



“한국사회에서 80년대는 그야말로 갈등과 변혁의 시대였다. 근대 이후 지난했던 우리 역사의 지층을 관류해 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더욱 첨예화된 계층ㆍ계급 간의 격화현상, 제 모순과 삶의 질곡들을 타파하려는 의지와 실천적 노력들이 민중운동, 민주화운동을 통해 나름의 해결책을 강구해나간 시대였다.” <장경호, 삶과 예술의 본원성을 향하여, 미술세계 10월호, 1991.>


돌아보건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의 열기가 폭발적으로 번져나간 87년 6월은-더 나아가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기점으로 삼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비단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층위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의 여러 층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의 역사와 시대현실에 대한 자각, 인간적 삶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도모하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전국적 지형에서 보여준 각 층위의 변혁운동과 더불어 우리 지역에서 현실참여와 민중문화운동의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 ‘지역성’의 정확한 의미와 전략에 대하여는 물론이고 좀 더 내밀한 ‘문화’적 관점에 대하여 지속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게끔 출발점을 마련해 준 지점이 바로 80년대 초반, <녹두>와 <남민시>, <땅> 등을 통한 선봉적 역할1)에 있으며, 이후의 다양한 문예활동 속에 녹아있다는 점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나간 20년의 모든 인식과 담론의 갈래, 사(史)적 문맥을 여기서 모두 담아내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굳이 그리 해야 할 필요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이 자리에서 제기되고 풀어가야 할 질문은 ‘지금 여기의 문화운동’으로 요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가 현재를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지나간 20년은 일종의 거울이다. 따라서 거울 속의 나를 되짚는 일은 결코 지루하거나 하찮은 어떤 것이 아니며, 대부분 지금 여기의 문화적 속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산재한 많은 연구와 담론들 속에서 운위되는 ‘문화’론은 적어도 20년 전의 그 ‘문화’론과 상당부분 “결이 다르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오늘날 자의건 자의가 아니건 작가들은 사회로부터 적잖게 소외되어 있다. 점점 더 '예술'을 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새로운 산업적 구조 속에서 작가들은 이전에 차지했던 권좌를 상실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술은 점점 더 산업화, 구조화되어 가고 있고, 그 흐름은 완전히 제도적으로 진행된다. (중략) 피에르 부르디외를 빌자면 '예술 생산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현대로 올수록 예술생산이란 변별된 영역을 위한 최소한의 독립성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소통의 황홀경' 안에서 이끌기보다는 이끌려 가는 사람들의 부류로 재빠르게 밀려나고 있다. 그들은 영향을 주기보다는 광고와 영화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동일하게 영향 받는다. 자신이 되려는 몰입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의지도 점점 더 이전처럼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 한다.” <심상용, 시급하고도 유일한 ‘심스페이스’의 비전, 2003>


말하자면 오늘의 문화론은 최소한 ‘민중적 삶의 지난함과 현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극복’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실천 명제로부터 한참 떨어진 지점에서 어긋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어긋남이 그 자체로 잘잘못의 문제로 소급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국가-제도 중심의 문화주의 타령이 초국적 자본의 산업-경제화 전략과 상품미학의 스펙터클에 전적으로 ‘매달려’ 가는 양상이야말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지역문화의 운동적 실천’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화려한 수사를 등에 업은 초국적 자본의 해체전략 앞에서, 우리는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의 유토피아가 전 지구적 단일문화의 관철이라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악몽으로 실현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된다.


“문화의 상품화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제는 땅이나 햇빛, 공기, 집, 물, 옷, 성(性), 종자, 말(언어) 같은 기본적인 생존의 토대뿐만 아니라 신용, 종교, 교육, 사상, 학문, 예술, 감수성, 상상력, 공동체의식, 생태학적 대안, 변혁이론 등도 모두 상품화되고 있다. '담론 시장'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사상의 주식시장'에 상장되지 않은 생각(아이디어)은 설득력과 실천력을 갖지 못한 공상일 뿐이며 상품으로 팔리지 않는 예술은 이미 예술이 아닌 것이다. (중략) 따라서 문화의 상품화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문화가 초국적자본의 매력 있는 사업 분야라는 것, '문화의 세기'라는 말은 문화가 정치·경제를 선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문화가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가 되는 시대라는 것, 수지맞는 문화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초국적자본은 이미 치밀한 시장조사와 정지작업을 끝마쳤다는 것, 초국적자본의 문화시장 공략은 전방위적으로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민족예술의 의상을 걸치고 인사동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것, 아니, 초국적자본은 이미 우리의 몸속에 둥지를 틀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쓰라린 현실주의의 첫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정지창, 신자유주의시대의 민족예술운동.>


이제 예술가나 운동가보다는 활동가와 기획자가 더 많이, 더 넓은 공간을 헤집고 다니며 우리의 문화를 직조해내고 있다는 지적이 낯설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기까지 하다는 점이, 앞서 말한 ‘지금 여기의 문화운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풀어야만 할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더불어 적어도 IMF로부터 FTA까지 건너오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 우리는 별 다른 문화적, 예술적 ‘운동’을 제대로 치러보거나 견지해내지 않았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고백할 때만이 앞으로의 문화적, 예술적 ‘운동’의 진로를 구상해내는 데 하나의 기준점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의 본원성이란 그것이 어떻게 규정되고 언표되든 간에 인간적 삶의 본원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삶의 본원성을 떠나 규정되는 예술의 의미는 어차피 경향성의 문제이며, 그러한 경향성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강압일 경우가 허다하다. 예술은 오히려 이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예술은 오직 삶에로의 지향성을 갖는다. (중략) 이를테면 그것이 놀이든 해학이든 풍자든, 또는 현실비판이든지 아니면 민족미술, 민중미술, 노동미술, 농민미술, 현실주의미술 등 어떻게 불리워지든 간에, 또는 역사적이거나 정치, 경제적이거나 사회적 입장을 선별적으로 취하든지, 그것들의 제 층위와 층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거나 상징적으로 다루거나 간에, 예술은 언제나 삶의 참모습에 다가서 있어야 한다.“ ,장경호, 삶과 예술의 본원성을 향하여, 미술세계 10월호, 1991.>


거대담론이 패퇴하고, 적대적 이분법이 아닌 다중의 다양한 가치가 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일상성의 문제, 따라서 개체적 실존의 문제, 글로벌한 시대의 노매드한 삶에 대해서,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시민’ 사회이므로 ‘민중’이 우선되지 않는다는 말임과 동시에 모바일 텔레 커뮤니티가 회화의 아우라를 잠식한지 이미 오래라는 ‘정보’를 들이미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필자 역시 충분히 동의한다. 그 만큼 우리의 몸이 정신 못 차리게 훈육되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시, 지역은 어떻게 ‘문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문화는 어떤 공간에서 ‘지역성’을 발출할 수 있는가?


오늘, 이와 같은 몇 개의 단속적인 문장과 앞뒤 없는 발언이 민주적 과제는 물론이고 지난 20년의 다기한 변화를 살펴내기에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87년 6월 항쟁의 결과가 우리 지역의 문화적, 예술적 저변에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를 따지는 일 역시 이 정도 수준의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진술에 그칠 일이 아님도 분명하다. 다만 바라는 것은 ‘전선’이 사라졌다고 믿어버린 지난 10여 년의 기간 동안 우리 눈앞에서 ‘현실적’으로 벌어졌던 문화공급과 문화소비의 양상들, 그에 따른 문화행동과 문화생산에 대하여 좀 더 길게 말하고, 좀 더 깊이 따져볼 수 있는 기회를 곧 가져야만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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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1 <전북지역 미술운동사>2)


1980년대 민중미술은 한국사회에서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이념과 대중활동 및 그것을 추구하는 미술가 조직으로부터 발생한 예술운동 과정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한국사회 현실을 형상화하는 창작방법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만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하지만 미술이 한 사회 안에서 나름의 자생력과 그 사회에 대한 예술적 응전 능력을 갖출 수 있는 힘을 잣대로 헤아려 보자면 민중미술의 독자성이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물론 서구 예술방법의 잣대로 재면 그 창작방법이 리얼리즘이라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중미술은 창작방법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회 진보의 이념과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발생한 포괄적 이념이자 미학이자 대중 속에서 숨쉬는 예술적 실천이다.3)


80년대 살벌한 독재정권 아래에서 '미술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화가들은 미술을 무기로 이 땅의 민주화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즉 양심적인 작가라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80년대 화가들은 거리에서 선전선동 활동-벽보, 깃발, 걸개, 판화운동 등-을 벌이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고, 또 다른 일부는 전시장 중심의 창작활동을 통해 현실비판적 내용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공안당국의 강압적 탄압으로 지하화했고 몇 몇 작가들은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또한 전국적으로, 민미협(전시장미술 활용론-서구 이식미술 활용론)과 민미련(현장미술 활동론-민족 전통미술의 계승론)이라는 이름의 두 갈래로의 분파현상과 마찬가지로 전북지역에서도 들․바람․사람들, 겨레미술연구소 등의 두갈래 양상을 띠며 그 기틀을 형성한다. 80년 초 광자협, 현발 등 민중미술운동 조직의 출현을 시작으로 83년 전북지역에서도 '땅'동인이 조직된다.


* 땅/1983.10~

송만규, 윤양금, 이영진, 김복숙, 권옥경, 김용택, 안도현, 강태형, 정태한, 이재성 등이 동참한 “땅-이 바닥에 입술을 대고”라는 이름의 시와 그림전을 출발점으로 하여 이후 한경태, 박흥식 등이 합류한다. 전북지역에서 최초의 민중미술운동단체였다고 할 수 있으며, 곧바로 이리에서 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이리공단의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고 한편으로 직장인이나 대학생들과도 관계를 확대하였다.


이 땅의 모든 문화가 비로소 제자리에 돌려져 삶과 노동의 밑거름이 되고 삶의 현장에서 생성된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라 할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인 우리 모든 민중들의 모습이 인간다운 삶으로 그 인간성이 구원․회복되어 구체적인 삶의 희망이 구현될 때 비로소 우리 문화의 본연의 모습이 빛날 것이다. ......애매하고 막연한 인간주의나 폐쇄된 문화애호주의를 거부하며 이 시대의 진정한 소집단 문화운동의 주체들과 공동, 공통의 뜻을 같이하는 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땅, “땅 모음전에 부쳐”, 1983>


이와 같이 관념적 인간주의와 문화주의를 반대하고 현장성과 민중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분명한 입장은 이들을 변혁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었다. 임실농민 고추싸움, 장계 소몰이 싸움 등 각종 민주세력과 연계한 선전선동활동을 하였으며 시민미술강좌, 대학미술패와 연계사업과 조직사업(특히 송만규는 서울, 부산, 광주 등지를 돌며)을 지원하였다.


* 전국미술운동 연합수련회/1984

1984년 7월 전주에 있는 소극장 녹두골에서 미술운동가를 위한 연합수련회가 개최되었다. 이 수련회는 주로 학생미술운동 동아리를 중심으로 꾸려졌는데 서울과 전북, 충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학생 30여 명이 참가하였다. 6일간에 걸친 이 수련회는 학습과 토론, 창작, 놀이, 노래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이 수련회에서 배포된 “84미술론”이란 소책자를 통하여 많은 문제제기와 토론을 진행하고 이전의 어떤 미술론보다도 앞선 선진적인 미술운동의 방침을 제시하게 된다. 수련회는 이외에도 선진적인 미술활동에 대한 인식일반을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서로간의 연대활동을 가능케 할 기초로서 활동가들을 맺어 주는 성과를 낳았다.


* 전북지역 청년미술공동체/1988~

전북지역에 있어서 대학 미술동아리의 형성과 발전은 초기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한계를 박차고 조직적이고 목적의식적인 미술학생운동으로 나아감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대체적으로 1986년을 경과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땅 동인이 형성되면서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생 몇몇이 학내 시각매체의 요구를 구체화하였고 또한 전북대학교에서는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미학연구회 ‘푸른나무’에 1985년 무렵 미술전공학생이 결합하면서 시각매체활동을 수행한 것이 전북지역 학생미술운동의 전사였다.


이들의 전통을 이은 것이 각 대학의 학내 미술운동조직이라 할 수 있으며, 전주대에서는 1986년 ‘쥐불’이, 우석대의 ‘그림사랑’은 1987년, 군산대의 ‘두레’는 1988년에 이르러 조직형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전북지역 학생미술운동의 확립에 의미 있는 계기로는 1984년에 열린 전국미술운동 연합수련회와 1986년 전북대에서 벌어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쟁을 들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미술이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는데 이것은 전북대 ‘푸른나무’의 이론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후 1987년 겨레미술연구소와의 결합을 계기로 1988년 8월에 전북청년미술공동체(이하 전미공)가 조직되는데 이것은 7월에 가진 겨레연 주관의 전북 청년미술가 수련회에서 각 대학 활동가들 사이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활동에서 벗어나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데 합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들이 밝힌 사업방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순집합적 성격을 극복하여 집단적 실천작업

둘째, 각 구조 속에서 정치적 의식각성과 집단주제토론을 통한 예술론 교양

셋째, 매시기 선전선동 시각매체 작업

<오월미술전 준비위원회, ‘회의기록’, 1988>


* 겨레미술연구소/1987~

'땅'동인의 일부와 학생미술활동가가 참여하고 전업적 활동가 조직체계를 확립하면서 현장에 투신하였던 이전의 활동가들까지 포괄하는 전북지역 미술운동의 단위가 된다. 나아가 소극장 '녹두골'을 중심으로 모인 연행예술운동 역량 및 문학활동가들과 연대하여 전북지역 민중문화운동협의체 준비위원회를 꾸리는 데까지 발전했다.


1988년 전주 시내에 사무실을 갖추면서 비약적인 역량의 강화를 이루고 창작위원회, 유통위원회와 총무, 대표 등의 조직체계를 꾸림으로써 완결된 전업적 활동가조직을 완성하였다.


송만규, 조재권, 김동욱, 노성래, 박흥식, 신석호, 김은희, 최은소, 김은준 등이 참여하여 6월항쟁 선전물 제작, 이석규열사 장례식 걸개, 전북지역 민주세력 대동한마당 걸개, 87년 시민판화 거리전, 전북지역 청년미술한마당 주최, 민족해방운동사 걸개 제작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88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에 이른다.


88~9년 송만규 수배와 탄압으로 비공개 활동으로 전환하였으며 91년 전국자주미술전(전북대 걸개그림전)에 참여하고 이후 구속 회원 석방투쟁을 1년 넘게 지속하였다. 92년 사회현실적 변화와 발맞추어 창작중심의 전문미술인 모임을 지향하며 발전적 해체를 하였고 이후 가보세의 출범을 보게 된다.


* 들․바람․사람들/1987~

87년 1월 창립총회를 기점으로 현장에서의 직접적 선전선동미술 사업과는 달리 전시장 중심의 창작활동을 통한 현실비판적 창작과 미학토론을 주요활동으로 하였다. 김맹호, 김선태, 김인철, 김진술, 김희경, 남택운, 박종수, 방정엽, 서재붕, 이기홍, 임옥상, 진동규 등이 초기 활동을 하였고 이후 장은숙, 정채열, 유대수 등이 참여한다. 1988년 5월 창립전을 시작으로 93년까지 5차에 걸친 회원전과 87년 이래로 거의 두세 달 간격의 좌담․토론회를 20여 차례 가짐으로서 질 높은 창작의 고취는 물론 미학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노력한다. 92년 이후 주요 회원의 상경으로 휴면을 하게 되며 94년 동학백주년기념사업을 계기로 지역미술운동 조직 간의 통합을 이루게 된다.


* 온다라미술관/1987~

86년 그림마당 민(전국민미협)에 이어 지역에서는 최초의 미술문화공간으로 문을 연 화랑이었다.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변혁에 동참하고 민족미술진영이 80년대를 통해 이룬 성과를 수용하며 대중과 접목시키기 위하여'라는 취지아래 신학철 초대전을 시작으로 임옥상의 아프리카현대사, 이철수 판화전, 북녘의 산하전 등 82회의 전시와 한국미술사 강좌(이태호), 미학강좌(황지우), 민족미술 강좌와 25여회의 강연, 그 외의 영화제나 판화교실 등을 기획했으며 올바른 미술문화의 정착과 확산을 실현하려 노력하였다.


* 가보세/1993~

겨레미술연구소의 후신으로 정치, 사회 현실의 변화로 인하여 창작중심의 활동을 목적으로 창립한다. 송만규, 윤양금, 이종연, 김채, 한경태, 노성래, 고현, 진창윤, 정종화 등을 주축으로 '군산항에서 본 역사전'을 시작으로 격주모임을 하는 등 의욕적인 출발을 보였다. 94년 동학100주년 기념사업에 전북지역 민민진영 미술인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이는 전북지역 민족미술인의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 그림마을/1994~

시민미술운동의 확대를 목적으로 양선형, 이수진 외 10여명으로 출범하였다. 판화강습, 유화강습, 미학연구, 예술기행, 공동창작, 걸개제작 등 미술 대중화의 확산에 힘쓰고 있다.


* 전북민족미술인협의회/1994~

1994년 동학100주년 기념사업을 치루는 과정에서 전북지역 민족미술인(단체) 진영의 통합의 당위성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그 해 6월 25일 1차 모임을 시작으로 4차례에 걸친 준비모임을 거쳐 95년 1월 7일 나종희, 송만규, 윤양금, 남택운, 최춘근, 김맹호, 지용출, 김미경, 진창윤, 유대수, 이근수, 양선형, 고 현, 안은용, 김영옥, 허길영, 이기홍, 김은주, 최영석 등을 주축으로 들․바람․사람들, 가보세, 그림마을(일부) 등의 단체가 통합하여 출범하였다.


90년대의 변화된 현실 속에서 창작의 진정성을 되찾고 진보적 미술전문인을 규합하여 지역미술을 올바르게 이끌어감을 그 목적으로 하여 그 해 4월 창립전을 기점으로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으며 이후 지역의 젊은 작가들의 꾸준한 관심과 참여로 지역미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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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종민, 지역문화운동의 방향과 과제, 호남사회연구 창간호, 1993.

주 2) 80년대 미술운동사, 전북민미협 회원교양자료, 1998

주 3) 민중미술15년, 최열․최태만 엮음, 삶과꿈,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