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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51013-임택준개인전-두 평반의 고독에 대하여

by PrintStudio86 2017. 7. 25.

[전시]두 평반의 고독에 대하여 

by artwood 2005/11/18 16:47 필부를꿈꾼적없다 


임택준 개인전 20051013~ 우진문화공간 전시실

[서문]두 평반의 고독에 대하여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1), 비유컨대 왜 하필이면 여기서 고독한가에 대하여 그조차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 두 평반 남짓의 닫힌 공간으로부터 탐색할만한 의식들은 이 외에도 무수히 많다. 한 발 물러서서 말하자면 이해의 층위가 다른 세계를 굳이 알고 싶어 한 나의 이성이 오만한 탓이므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어떤 이유’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고독이 사라지는가? 그러므로 이 말들은 ‘그림들’에 관한 보편적 해석이 아니라 없는 세계에 대한 구체적 신체로서의 붓질에 연관된 더듬거리는 질문이다.


최종적으로 예술은 타자로부터 실현된다. 그것이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도시는 눈 뜨지 않았고 토방 깊숙이 웅크린 몸들은 거친 숨결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배제되고 탈선은 감금되기 십상인 이 아침에 ‘그림’으로 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그는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도피의 일종이므로 주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직설로 말하자면 그의 화면은 고독하게 몸부림치는 정지태(態)다. 반대로 말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 두 평반의 작업실-화가의 가슴 속은 아직 경계를 넘지 않은 새벽의 잿빛이다. 동시에 신열에 들뜬 붉은 육신이라고 ‘표현’될 수 있지만 그렇게 일일이 색조를 따지고 있을 겨를이 과연 있겠는가.


형태와 형식과, 회화의 하나의 지지대로서 구조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불안과 체념이 수시로 발생하는 이 쪽과 저 쪽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는 일이 차라리 덜 고독하다. 두 평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가 앉았던 자리의 정밀한 평방미터를 계산하는 작업이 차라리 더 ‘쎄게’ 붓질의 경계를 밀고 나간다.


마찬가지로 에밀 놀데의 붉은 색으로부터 사물의 이전-배후에 대한 초월의 상상이 그나마 근대적 소외와 불안의 징후들을 안위하였다면, 조금 더 산발적으로 질료의 이면으로 숨어버리는 지시와 의미의 두터운 형상들이 도대체 남한 사회의 현재를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것인지 연계하기 어려우므로, 막연하게 두려운, 둔탁한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고자 하는 그의 음울한 몸짓-퍼포먼스에 등장하는 붉은 천에 기대어서만이 그의 주름진, 휩쓸고 지나가는 속도보다는 약속대로 쌓여간다는 취지에서의 ‘붓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느 때 무엇으로 은유가 직설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말하자면 그는 파악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짐작되어진 현상을 진득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읽혀진다.


그런 식으로 미술-적 행위의 존재는 결국 없음이 분명한 태도, 이미지로부터 근거하여 있음의 현전을 따르고자 할 것이다. 두 평반의 누적된 습기도 마찬가지다. 반(反)이성의 공포와 증오-처럼 장식된 우울한 얼룩들은 근거 없는 외상(外傷)의 각혈에 다름 아니다.


경계는 흐물거릴 것이다. 되돌아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치유가 목표는 아니지만, 그렇게 한 쪽에 서 있다 보면 삶은 바다처럼-마치 있어도 없거나 없어도 있는 것이 분명한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것만이 유일하게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다. 가늘게 부여잡은 붉은 천과 일그러진 얼굴들이, 텅 빈, 푸른빛들이 명백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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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