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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60328-조영남의 새로운 발견

by PrintStudio86 2017. 7. 25.

조영남의 새로운 발견

20060328/2006년 4월 문화저널 시평

유대수/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시기획자





비록 결론은 정 반대로 끝나지만, ‘저속한 유행가 가수의 치졸한 전시회’라는 김민기의 오래 된 빈정거림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조영남의 작품을 대면한 내 첫 인상이었는데 말하자면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는 화가 조영남’이라고 해야 좀 더 사실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에도 꺼림칙한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만큼 우리는 조영남이라는 대상을 그저 몇 가지 재능과 끼를 가진,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 된 연예인 정도로 치부하는데 깊숙이 젖어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선입견을 교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 뜻에서 오히려 정말 중요한 질문 하나를 음미해 볼 만한 기회를 갖는다. “미술은 누가, 무엇으로 하는 것인가?”


일견 그의 그림에 대한 감상과 평가를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너무 쉽게 건너뛰게 만드는 것은 그가 다루는 소재가 소위 화투짝이라는 점에 있어 보인다. 즉, 그것은 너무 익숙하고 ‘쉬운’ 것이며, 미술을 미술답지 않게 만드는 천박한 ‘무엇’이라고 믿는다. (도대체 미술이란 무엇인가?) 사실 조영남은 그 동안 심심풀이 화투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많은 실험적 작품들의 소재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실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작품들 중의 일부였을 뿐임을 확인하고 난 후라면 그렇게 ‘쉽게’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73년의 첫 개인전 이래로 30여 년 이상 꾸준히 그림을 그려 온 조영남의 이번 전시는 니콜라 드 스타엘과 마크 로스코 등에 심취했었다는 6~70년대 초기 추상 회화로부터, 바구니와 사진을 이용한 입체적 콜라주 작품, 태극기와 화투를 끌어들인 작품 등 그의 화력 전반에 걸친 모든 것들이 선보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의 성과라는 게 결코 양量만으로 측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시가 열린 공간의 규모를 익히 아시는 분이라면 개인 작품으로 그 공간을 가득 메운다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00여 점을 넘어서는 전시작품 중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조각적 태도를 취한 그의 조형물이었다. 오래된 놋요강을 접합하여 <현대미술의 출발>이라고 제시한 것이나 깡통을 두드려 편 다음 다시 뾰족한 첨탑 형태로 쌓아올린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도>, 낡은 문틀의 구축과, 오래된 주판의 형태를 연결하여 기술의 진보를 지시하는 ‘컴퓨터 새’로 성형해 내는 그의 감각은 매우 탁월하다. 덧붙여, 스티로폼을 다듬어 만든 기념비적 인물상을 만난 것은 평면회화를 바탕으로 한 가벼운 일상적 오브제의 활용 정도의 작품 경향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의외의 신선함과 파격이었다.


조영남의 조형 언어는 한 마디로 거리낌 없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만큼 그의 화면은 자유로우며 미술형식의 구차한 이론적 언급으로부터 구애받지 않는다. 말 그대로 천성이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존의 사회적 틀이 강요하는 여러 제약으로부터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이는 그의 일상적 태도마냥, 그의 미술조차도, 이유 없이 진지한 통속을 비껴나가는 너스레와 야유의 변용이라고 느낀다. 이 점은 오랜 외국 생활에서의 개인적 향수 달래기나 취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적어도 태극기라는 국가적 경배의 대상은 이천이년 월드컵 이전까지 그리 쉽게 구겨지거나 해체되는 예술적 소재가 아니었다. 초상집 담요 위에서나 무심히 마주치던 화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 그 네모진 경계 내부의 구도와 색채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치열한 자본 경쟁의 소모적 도구라는 쓰임새 이외의 다른 용도와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순발력은 그야말로 ‘뜻밖이다.’


조영남의 미술이 태극기와 화투에서 이미 충분한 자기 완결의 구조를 지니고 끝마친 것이라고 서둘러 정리할 생각은 없다. 작품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재단하는 일 역시 별도의 과제로 남는다. 조영남과 그의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채 버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만 ‘하나의 조국을 위한 두 개의 깃발’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또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그의 미술이 튀어나갈지 기다리는 일이 ‘심심한 인생살이의 양념처럼’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 또한 조영남의 봄바람이 남긴 후과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