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23. [리뷰]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허무의 무게-유대수 목판화전
채우승 20030723
작가는 오랜 동안 아주 친하게 지내온 동생이다. 한때 ‘작업실 사람들’이라는 모임도 함께 했고 지금은 ‘지역작가 포럼’이라는 소수인원으로 이루어진 모임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구질 자질한 인연 때문에 서로 자주 마주치며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알게 되었다. 그는 거의 5년이라는 시간을 작업과는 상관없는 일들을 해왔고, 그 동안 솔자리에서 간간히 이런 말들을 내뱉었다. ‘작업에 목매고 싶지는 않다. 작업하는 것이 분명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미술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정신병적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작업을 한다는 것이 미술판 안에서 전제된 미술적 문맥에 휩쓸리는 유행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미술을 좋아하고 그래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일상적 생활이 되는 것이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그는 5년이라는 세월을 미술과 관련된 갤러리 큐레이터, 전시기획자, 무대 제작자, 디자이너 등 적지 않은 미술 관련 업종을 경험했다. 그런 와중에도 개인전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정신병적 강박증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후유증 때문인지, 주위에서 저 자식 뭐 하는 자식이야, 작업도 안 하고 ’어믄짓‘만 하고 다녀 하는 눈총 때문인지, 아니면 5년이라는 세월이 그에게 다시 작업할 이유를 제공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전시 카달로그에 기록한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냥 어느 순간 나를 뒤돌아보았을 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허전하고 막연했다. 아무튼 그런 속에서 내 자신이 정리되고 반추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그가 다시 작업을 하게 된 이유이다.
이유가 어찌 됐던 서신갤러리에서의 그의 다섯 번째 목판화전은 그 자신의 모습이 반추된 듯이 ’생각에 잠기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앙상한 나무, 원경의 도시, 풀과 꽃, 목어, 할머니, 돌탑,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 서있는 사람, 앉아있는 사람, 이러한 소재들은 목판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이며 식상한 단어들의 모임이지만 이러한 소재들이 화면 안에서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그의 작업들은 쓸쓸함과 고독과 황량함이 배어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 다양한 삶의 형태 어깨 너머에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큼 살포시 기대여 미소 짓는 허무가 내면에 거주하고 있다. 이 솜사탕처럼 가벼운 허무는 대기중의 공기처럼 하찮은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해일이 이는 바다의 파도처럼 허무의 가벼운 무게에 짓눌려 본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도 왜 가슴이 아리는 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허무의 무게를 느끼는 자들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 그 작품에서 사람은 나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무는 그 곳에 등장하는 사람의 대상물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허무다.
작가는 그것을 형상 이외의 어떤 것, 여백이라 말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여백이 아니라 ’허당‘이다. 형상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비어있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허무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과 나무는 그 나머지 공간과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않고, 나무와 사람간의 긴장감이나 의미적 결합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나무는 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허무 위에 존재하며 허무의 불안한 무게에 감싸여 있고, ’허당‘과 같은 허무는 모든 존재를 삼켜버릴 듯 창백하다.
수많은 모임과 사석에서 그가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을 대하는 생산자-작가와 소비자-관람자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것이다. 그중 핵심적인 내용은 왜 작가들은 미술을 무겁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머리털을 움켜잡고 괴로워해야 하는가? 왜 보다 쉽고 편안하게 작업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예술, 미술, 좋고 나쁨, 중요한 것, 이런 거창한 것들 말고, 아무 것도 아닌 것, 편안하고, 아무나 즐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그는 5년 전 작품에서 여성잡지의 패션 광고의 이미지, 도심 한 쪽에 비집고 나온 풀 한 포기 등과 같은 이미지들을 실크스크린이나 목판화 기법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판화가 가지는, 하나의 화면을 화면과 동일한 규격의 한 판으로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가 담겨져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고 한 두 개의 이미지를 새긴 판으로 화면에 도장 찍듯이 채워 나가는 방법을 실험하기도 했다.
하나의 판으로 아주 다양한 화면을 만들어 냄으로써 판화의 특성 중 하나인 동일한 에디션을 다량으로 만든다는 것에서 약간 빗나가는 시도를 했었다. 여기에서 작품 하나하나 시시콜콜하게 거론하는 것은 중요치 않을 것 같고, 나에게 가장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그가 판화 하는 방법에서 도장찍기 수법이다. 돌탑은 박남준 시인 앞마당에 있는 것이고, 목어는 수을관 복도에 매달려 있는 것이며, 풀꽃은 그의 작업실 뜰 안에 마구잡이로 자라난 것이다. 구체적 장소와 소속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이 각기 다른 판 위에 새겨진 다음 한 화면 위에 마치 필요한 항목을 직인으로 확인하듯 찍혀져 현상한다.
’塔-人-魚‘에서 보이듯이 화면 안에서의 원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백으로가 아니라 빈 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이 세 가지 이미지는 각기 독립적인 세계를 가지면서도 하나의 불명료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각자의 이미지들은 마치 저녁식사 때 텔레비전으로 교통사고 참사를 보듯이 서로를 감지하고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 서로에게 중요하기도 하고 중요하지 않기도 한 존재들 간의 세계처럼...
’생각에 잠기다-2‘에서는 평상에 걸터앉아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위쪽의 다섯 그루의 나무가 등장한다. 나무와 사람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다만 한 화면에 놓여진 관계일 뿐이다. 나무와 사람은 뚜렷하게 양분화되어 있다. 이 둘은 서로 독자적인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한 화면 안에서 관계맺음을 종용당하고 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갈구해서 이 곳에 왔겠는가. 어쩌다가 이 곳에 놓여졌고 이 곳에 살다보니 타자와 관계하고 사건이 진전되고 또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로 아무런 의미가 발생하지 않기도 하고 삶이란 이런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삶의 요소가 숨겨져 있다. 한 화면 안에서 이미지들 간의 관계는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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