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24. [문화비평] 공공미술에의 접근
새전북신문 2002.11.24
* 이 글은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글 일부를 인용, 압축한 것입니다.
현대미술은 예술을 전문가의 특수한(독창적인) 활동(창조)의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자기모순을 배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은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관계나 필요, 요청과 무관하게 매우 사적인 것이며 개인의 특수한 재능의 자유로운 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것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공동체의 관심과 이익,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염두에 둔 개념인 ‘공공’의 지점과 만나면서 일정한 모순과 상호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자율성을 자기존립의 근거로 삼아온 현대미술이라 해도 결국 시대, 사회적 조건과 무관할 수 없으며, 사회적 수용과 용인을 통한 평가에 의해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사회를 떠난 미술이란 성립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그 의미와 필요에 대한 요구가 점증하고 있는 공공미술의 개념이 앞서 말한 ‘공공’과 ‘미술’이 만나 상호 충돌을 야기하는 단순한 합성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면 좀 더 진지하게 미술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대안적 개념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에의 접근을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들을 생각해 보면, 먼저 공공미술은 대중과의 소통이 우선이므로 그들의 보편적인 취향에 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사실 대중들의 취향이나 미적 기준이란 애매하기 짝이 없는 것인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많은 사람이 원하니까 이것을 세우고 저것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리는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미술과 관련한 논란의 많은 경우가 이러한 '취미와 기준의 충돌'에 의한 경우가 많다. 연장시켜 보면, 대중적 친화력이 높은 작품을 단지 공공장소에 가져다 놓았다고 해서 공공미술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또는 개인 소유의 건축물 앞에 세워진 조형물의 경우, 그것이 원칙적으로는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이용할 수밖에 없는 부위를 점유하거나 인접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라면 공공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지점도 있다. 이른바 1%법이 사유재산에 조형물을 설치하도록 규정한 것도 이러한 공공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공공미술로서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작품의 질적 수준뿐만 아니라 공공적 소유, 개방성, 공적 의미, 공공의 기대에 부응하는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버지니아 마크시모비츠(Virginia Maksymowicz)는 이상적인 공공조각에 대해 "과거와 같은 기념비적 성격이 없는 것, 조각 자체를 일상생활에 통합시킬 수 있는 것, 본질적으로 미술가의 개인적 진술을 피한 것, 비미술인들이 다양한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대중 및 소통의 개념을 신중하게 고려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술가의 개인적 진술, 사적인 자기표현을 위한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 작가 입장에서 보자면 결코 유쾌한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작가의 창의적 세계는 고유한 것이므로 그것에 간여할 수 없다는 믿음 아래 모든 것을 작가의 판단과 결정에 위임해버림으로써 지금, 여기서 공공미술은 증발하고 공공미술을 빙자한 사적(私的) 미술이 난무하는 결과를 빚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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