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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21006. [문화비평] 미술유감

by PrintStudio86 2017. 7. 10.

20021006. [문화비평] 미술유감

새전북신문 2002.10.06


미술은 구차하다. 그림 그리기라는 유희가-가끔은 모종의 신념에 가득 찬,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틀 속에 빛나는 예술 제도로 자리잡은 이래 지극히 개별적인, 관념의 일루젼으로서의 미술은 구차스럽다. 아니 어쩌면 화가라는 존재가 구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흔히 근대라고 부르는 체제 유지의 합의 속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자본적 삶의 방식과 예술적 이상의 실현을 동시에 요구한다.


그렇게 한데 버무려진 미술 실천의 삶이란 몇몇 잘난 화가들을 제외한다면, 말 그대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미술 또는 화가들의 상대적 필요는 여전하며 사회적 장치의 하나로 그 기능을 지속해 간다. 또는 지속시킨다.


이를테면, <디자이너, 역사를 읽다>전을 가정해 보자. 이런 종류의, 그러니까 역사와 미술이 서로의 영역을 적당히 침범(?)하고 교접하여 시각이미지와 문화 텍스트를 생산해 보고자 노력한 종류의 전시물을 나는 무척 당혹스럽게 보았다.


약간의 아쉬움과 동시에 더 많은 신선함을 얻은 전시를 두고 당혹스럽다고 말한 이유는 사실 전시 자체가 아닌 다른 지점에 있다. 그것은 1년여에 걸친 기획과, 동학에 관련된 수 차례의 답사와 연구, 천만원대를 넘나드는 전시연출 비용 등이 고스란히 참여작가-대부분이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의 몫으로 채워졌다는 내용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상대적 필요와 문화적 장치로의 작동을 요구받아 마땅한 미술행위 전반에 깔린 안이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접근 태도를 감지한 탓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종류의 것들은, 제도의 영역에서 좀 더 확장될 수 없었을까? 도시의 정체성과 지역의 패러다임에 연계한, 단지 화가들의 정신적 감회나 아이디어를 진열한다는 식으로만은 읽히지 않을, 그러니까 미술 내적인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 다시 돌아와 언제든 열람 가능한 문화적 아카이브로 쌓이는, 공공적 의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문제는 항상 화가들-정확하게는 디자이너들 자신에게로만 되돌아오는 걸까? 등등의, 질문들이 떠오른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한번의 전시-의 모양새에 모든 원인과 결과가 매달려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된 것이고, 비약적으로 유추된 것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현대미술의 모더니티는 여전히 미술을 '순수한' 개별적 사유체로 붙들어 놓고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관리하고 재생산한다고 자처하는 시민사회의 그물망은 그 촘촘함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음에, 이제 미술행위는 다의적이며 멀티세션한 프로그램의 영역으로 변환시켜내야 할 고민의 지점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화가들의 창조성이나 진정성의 문제와는 또 다르게, 이런 고민의 축은 당연히 미술 또는 화가들 내부에 있지 않다. 시민사회 일반의 관심 속에 있다는 말이다.


전주시의 문화예술 창작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들인(?) 작품들이 문화의 집과 박물관 등을 포함한 기관들에 나누어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것이 예술을 골고루 나누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는 분명 기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제도로서의 지원과 궁극의 문화 향유의 질적인 상향조정에의 애착으로 보자면 좀 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돈 몇푼 쥐어줬다고 해서 끝날 미술문화의 공유가 아니며 건물 몇 군데 화사한 그림을 걸었다고 해서 손 털고 물러나면 그만인 ‘퍼블릭아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행위에 관련한 공공적 지원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소통의 출발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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