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701. 진실한 세계는 어떻게 생겼을까? - 위험한,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들의 도발
[서평]문화저널. 조이한의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
'진실한 세계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 말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책의 내용과는 문맥이 전혀 다른 어느 시평에서 잠시 빌려온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느끼는 세계에 대한 부정'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지독한 정도는 아닐텐데 짧은 질문이라고 해서 마찬가지로 짧은 대답을 들이대기에는 왠지 버거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코 간단치만은 않은 질문이야말로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를 유지시키는 원천이 되어 주기도 하며 '현재를 역사로 의식하는 예술가들의 태도'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자기 세계를 둘러싼 모든 당연한 것에 대한 의심이며 안정적인 것에 대한 회의다. 고정되거나 지속되는 것들에 대한 비틀기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반성적 권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의 연속선상에서 그렇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틀로부터 눈치 없이 삐죽 튀어나오는 일은 저자의 말마따나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들은 종종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며 문화적으로 배척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몇 예술가들은, 그렇게 위험천만한 질문들 속으로 순순히 자신을 밀어 넣으며 현재적 삶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여전히 제도와 관행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일탈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가 특별히 주목한 다섯 명의 미술가들-을 포함한 많은 수의 또 다른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부대껴 온 질문의 끝은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다섯 명의 미술가들(실제로는 여섯 명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끝 부분에서 목차에는 나와 있지 않은 앤디 워홀에 대해 제법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은 불필요하다. 워홀의 작업이 지배적인 미술양식을 거부한 '스캔들'이거나 관행으로부터의 일탈일 수는 있으나 그는 이미 그런 식의 일탈에 대해 충분히 납득하고 적응할 만한 인식능력을 가진 시대에 살았다. 그의 반미술적 메시지는 이십세기 현대미술의 자본적 매카니즘 안에서 그 자체로 이미 성공한 미술이 되어 팔려 나갔다.)이 '자기 시대의 지배적인 양식을 배웠으나 이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저지른 '발칙한 도발'에 관련한 저간의 사연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무슨 각별한 미술이론서는 분명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여타의 미술 교양서적들과는 또 다르게 각 장의 도입부를 소설 형식으로 쓰면서 독자들의 지루함을 배려하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전문 이론서도 아니고 한 편의 소설처럼 읽기 편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순수하게 감성적이고 자기 고백적인 에세이 수준에만 머무는 것도 분명 아니다. (이를테면, 한젬마류의 달콤한 교양미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바로크를 시작으로 18세기 낭만주의를,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입체파와 전위적 실험을 거치며 현대미술의 자본적 매카니즘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사의 뼈대를 놓치지 않으면서 각 시기에 해당하는 문제작들의 제시와 상세한 해석은 물론 동시에 당대의 사회적 인식의 출처와 변화의 맹아들을 차분하게 곁들이고 있다.
또한 저자는,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미술가들(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예술 또는 예술가들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천재적 불멸성이나 전설, 신화 등속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명작들의 수용 과정들을 보면 명작은 애초부터 명작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명작으로 만들어진 거라는 걸' 굳이 강조하고 싶기 때문일까? 저자는 단지 그들이 거부한 그림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훑어보며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중얼거리고, 작가의 고단한 삶을 더듬고,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엄숙하거나 또는 지루한 편견들에 대해 또박또박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거부당한 그림들은, 그림 자체로 남아있지 않고 '한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의 테두리'안에서 숨을 쉰다.
이것은 미술을 오직 미술 그 자체로만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회·정치적 환경과 종교·철학적 흐름에 대한 연결고리를 걸어주기도 하며 현실적 삶의 굴레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작품과 작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끔 하려는, 나름의 재치있는 나레이션을 시도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카라바조의 불행한 삶이 그렇고, '죄 없는 미술 작품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라고 어리둥절해 하는 뭉크의 고백이 그렇다. '제도 안에서의 인정과 예술적 자유라는 두 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해야만 하는 현대 예술가들의 삶을 체험한 첫 번째 화가'로 유추해내는 마네의 삶이 또한 그러하며, 뒤샹의 자전거 바퀴를 두고 남편과 옥신각신하는 입담의 표현이 또한 그렇다.
결국 미술은 환상 저 너머에 어렴풋한 신화로 존재하는 그 무엇만은 아닌, 우리의 일상에서 세계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벽돌이다.
조이한의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가 뜻하는 바는 호기심 어린 막연한 스캔들 즐기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바로 이곳'에 대한 간단없는 문제의식들의 자유로운 순환이다. 자기 시대와의 긴장, 관습에 대한 의심과 회의, 눈치보지 않는 창조적 열정 같은 것들이다. 바로 그 지점들의 교차로에서 발생하는 논쟁과 비평으로부터 미술사의 변화가 시작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들, 뭉툭한 관념의 껍질이 균열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그런 걸 찾고 비판하고 즐기고 감탄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얼마나 예술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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