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501. 적성에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한가한 척(!)하며 식구들과 함께 적성을 향했습니다. 운암과 강진을 지나 천담에서 한숨 돌리고, 구담 지나 장구목을 향해 산을 하나 훌쩍 넘었습니다. 좁은 듯 넓은 듯, 깊은 듯 얕은 듯 하면서도 물줄기 하나 저 만치서 숨소리 내지 않고 따라왔습니다.
그 천진하고 어릿한 물이 종내는 세상에 나가 보랏빛 강이 된다 하니 바다 가까운 끄트머리에서 그저 은어고기 잘라먹고 신트림이나 하던 놈이 괜스레 뒤통수가 근질거렸습니다. 나는 이제껏 시작을 못 본 채 끝자락에 서서 출생의 비밀을 연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구목이라. 이제야 그 시작 어림에 내가 서 있었습니다. 내 나이 서른여덟이니 꼭 서른여덟 해 만의 귀환인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요강바위도 보고 잠시잠깐 흐르는 물에 손도 적셔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도 그림처럼(!) 간들하게 떠 있는 통나무다리도 건너보고, 그러니까 그 물줄기 따라 꺼적꺼적 에돌아 나오면서 나는 그 시작을 생각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있는 것이 자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난 척 하지 않는 하나 하나의 것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고 사는 게 또한 자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장구목 물줄기를 돌아 나오면서 얼른 눈에 띄는, 저 혼자 빼어난 척 하는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냥 있는 것들, 어디에나 있는 것들, 자잘한 것들, 그러니까 그저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뿐인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얽힌 것들, 호흡하면서 섞인 것들, 그렇게 천연덕스러운 관계들만 남아 무위하고 무상한 것들뿐이었습니다.
물론 그 속에도 사람은 있습니다. 그 무엇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있고 잘나지 않은 채로도 그여 그여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시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소리내어 떠들지 않아도 있을 자리에 당연히 있어 주는 자궁 같은 것 말입니다. 세월은,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의 등을 떠밀어 그 시작의 자리를 벗어나게 했던 것이고 남보다 내가 앞서야 한다는 욕심은 우리를 자꾸 삶의 끝자락으로 밀어냈던 것뿐이지요.
세상에 어느 것들이 출발도 없이 과정을 이루고 있겠습니까?
그렇게 있는 것들과 그렇게 사는 것들의 모양새가 조금 밋밋하다고 해서, 거대하지 않고 찬란하지 않고 느리게 움직인다고 해서, 좀 더 빠르고 좀 더 커다랗고 좀 더 잘나 보이는 것들을 위해,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덮어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기 어디 물줄기의 끝자락에서 도회지의 반질거리는 톱니바퀴를 빠르게 돌려보겠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시작을 쓸어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남 없는 우리 모두의 시작이고 우리 모두의 출생지입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서 있게 해준 바닥입니다. 생활에 지쳐 잠시 잊고 지냈던 부모님의 안부 같은 것 말입니다. 삶의 밑천 같은 것 말입니다.
회문산으로 길을 잡아 나오다 진메마을도 다녀왔습니다. 앞산은 바짝 다가와 홍조어린 치마폭 내리깔고 물 흐르는 소리마저 가물가물하게 푹 가라앉은 모양이 하, 용택님같은 시인이 나올 법도 하겠다 싶었습니다.
다시 운암을 지나고 불빛 반짝이는 도회지로 들어오자니 장구목에서 담아 온 많은 것들이 그새 머릿속을 떠나고, 그 빈자리를 핸드폰 벨소리가 채워갑니다. 모바일 텔레커뮤니케이션, 참 편리한 생활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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