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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01117. 시놉시스에 대한 synopsis

by PrintStudio86 2017. 7. 10.

20001117. 시놉시스에 대한 synopsis

???  문화저널 ?호 리뷰. 박진희 개인전 2000. 11. 17-23

유대수/서신갤러리 큐레이터


이건 상자야! 라고 제시한 그 상자에 대하여 나는 일단 동의한다. 그렇다. 상자는 하나의 아웃 라인이다. 범주인 동시에 굴레이며 이 쪽과 저 쪽을 구분짓거나 똑 같은 방식으로 이 쪽과 저 쪽을 연결시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풍토다. 그러니까 관계의 일상을 시각화하려는 하나의 시도인 셈이다. 동시에 상자는 닫힌 자신의 내부로부터 바깥을 향해 호흡하는 관계항에 대하여 피력하는 것이다. 라고 보여진다.


여기 상자가 있다. 걸어 들어간다. 또는 담겨진다.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응시한다. 그 범주의 아웃라인을 고려해 본다. 하얗게 둘러쳐진, 벽면을 긁고 지나가는 슥슥거리는 소리와 가끔씩 팔딱거리는 흙더미와 아주 조그맣게, 또 가끔씩 흔들리는 잎사귀와 엉켜있는 가시철망과 전방위로 앵앵거리는 소음과 또 거울이 있다. 바로 내가 들여다보이는. 심장의 박동소리. 그러한 종류의 미술적 장치. 들. 여기서 상자는 그저 단순하게 주어진 하나의 공간만은 아니다. 애매하긴 하지만, 나를 둘러싼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 본다. 관계를 규정짓고 관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틀일 뿐이라고. 가끔 어디선가 빌려다 쓰는. 그렇다고 모호한 뜬구름은 아니다. 부유하지만 호흡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상자의 규격은 변할 수 있다. 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의식적으로 내가 상자 속에 들어간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상자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나의 사고의 의지와 인식의 일상을 보호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하기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스스로 변화하거나 자리를 뜬 적은 없다. 다만 상자만이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자신의 모습을 진화시켰을 뿐이라고 상상을 해 본다.


나는 상자 안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법하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또는 떠올리는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의 개체일 뿐으로서만 존재하던 나를 일상의 그물망에서 관계하는 나로 포섭한,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양육된, 상자의 내부로부터 말이다. 상자 안에 담겨진 나를 제외한 또 다른 몇 개의 나 또는 몇 개의 구멍을 본다. 이 커다란 상자를 제안한 작가는 친절하게도 상자 안에 오로지 나 혼자 남아있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그리하여 상자의 호흡에 거슬리는 일탈과 폭주의 꿈을 꾸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약간 작은, 그러나 이미 구속당한! 몇 개의 상자들을 덤으로 연결 지어준 것이다. 덤으로 연결된 몇 개의 또 다른 상자 덕분에 나 역시 몇 개의 또 다른 나로 분열한 것이다. 순식간에. 제기랄. 떨어져 나간 한 쪽의 내가 탄식한다. 의식은 명료하지만 원래의 나는 남아있지 않다. 몇 개의 떨어져 나간 내가 또 다른 몇 개의 상자에 담겨진다. 나는 없다. 동시에 나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하여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생각하지만 또한 무수히 많은 것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바로 '당신'이나 '우리 모두'로 바뀔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몇 개의-몇천 몇만 개의 상자를 벗어나 또 다른 무엇으로 변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고 생각한다.


이건 시놉시스다. 그러니까 좀 더 충분한, 확장된 진짜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작가의 말을 빌건대 이 상자는 좀 더 효과적이고 능숙한 '인공호흡'을 위한 일종의 연습이자 단편적인 사례다. 미술적으로 바꿔 말하면 러프 스케치Rough sketch나 에스키스esquisse정도의 지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상자들을 위한 하나의 상자라거나 호흡을 준비하기 위한 호흡이라고 해서 이제껏 말해 온 관계의 긴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짝 긴장된 또 하나의 관계가 발생할 따름이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짐작컨대, 관계함으로서만 존재 가능한 자신 또는 우리의 정체성을 보고자 했다면 그렇게 분열적이고 단편화된 상자들 속에서 구체적인 억압의 지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다르게 보아 인공의 거대한 구조 내부로부터 조차도 우리의 숨결을 가다듬게 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발아가 존재하고, 그 곳으로부터 다시 한번 나의 존재감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면 적어도 그의 미술적 장치-세트 연출의 결은 원론으로부터 미끄러져 있다. 물론 이토록 혼란스러운, 관계들의 거친 호흡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보여줄 뿐이다. 상자는 또는 인공호흡의 시각화는 그의 뜻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지시된 공간에서 지시된 의미를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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