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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00920. 의자, 지속 가능한 소통

by PrintStudio86 2017. 7. 10.

20000920. 의자, 지속 가능한 소통

20000920 - 0929 서신갤러리, 신석호 개인전-의자에 관한 명상-presence or absence



당신은 색과 색조를 보고 똑같이 당신은 형태와 형식을 보고 똑같이 당신은 변할 수 없는 것과 변화되지 않은 것을 보고 똑같이 당신은 진보와 서구화를 통해 걸러지고 편집된 냄새를 맡고 똑같이 당신은 셀 수 있는 것과 셀 수 없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겹침을 보고 똑같이, 말, 똑같이. 당신은 의지를 보고, 당신은 숨결을 보고, 당신은 숨이 찬 것과 의지가 없는 것을 보지만 당신은 여전히 의지를 봅니다. 의지 그리고 의지만이 이 땅 이 하늘 이 시간 이 사람들을 지지합니다. 당신은 하나의 똑같은 입자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떠나 이 모든 시간 동안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껍데기로 돌아갑니다. 그 공간을, 다시 요구하기를 요구하기 위하여.-차학경/월간<아트>10월호 75쪽에서 인용함.


신석호는 '의자'로부터 출발한다. 의자는 존재다. 동시에 부재다. 그러므로 그의 의자는 있음과 동시에 없음이다. 그것은 '부재의 현전같은 것으로서의 표상'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존재함을 통하여 부재함을 보고, 부재함을 느끼는 동시에 스스로의 명징한 존재의 위치를 드러내고 마는 하나의 교차의 지점에 서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차의 지점이라고 해서 그가 무척 혼란스러워 한다거나 작업의 결이 소란스럽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의자에 대한 '명상'은 정체의 깊숙한 내부를 향해 가라앉는다. 침묵한다. 들여다본다.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구멍난' 존재의 위치를 더듬는다. 결국 그는 자신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뒤집어지고, 잘리고, 뒹굴고, 사라져 가는 의자는 하나의 자리였음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의 기억의 표상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일종의 과격한 의지였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관계 안에서 발생한 소모적 일상'에의 의지다. 그것이 뒤집어지다니, 잘리다니, 데굴데굴 뒹굴다니. 스며들 듯 부유하는 화면 안에서 거세되어 가는 욕구를 본다. 이 쪽에서 저 쪽으로 혹은 저 쪽에서 이 쪽으로 건너뛰고자 몸부림쳤던 지난 몇 년의, 아니 남한 현대사의 맨 마지막 20여 년을 함께 살아 온, 줄기차게 개별적 정체의 '부재의 현전'을 가로막으며 온통 쑤시고 다녔던 온갖 억압의 굴레가 뒤집어지는 것을 본다. 잘려나가는 것을 본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을 본다. 나는 어쩌면 막연하게 바라볼 뿐이지만 그는 '상실된 존재와 상실시킨 또 다른 부분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과 고백'을 지시한다. 아니다.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음을 '증거'할 뿐이다. 그럼으로 그는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정체가 불분명하거나 소통이 부재한 상황 안에서 소통의 개진이란 제도화한 도구적 이성이나 표피적인 인간주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앉은 자리, 일어난 자리, 있는, 혹은 없는 그 자리로부터 과연 소통의 정체를 직시하는 '억압 없는 관계형성'을 이루어 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마치 그가 또는 그의 작업이 무척 난해한 서사적 구조를 등에 지고 있거나 미술 내적인 발언의 지점을 후기모던의 쌍방향 내러티브를 담지하는 교접의 지점에 세우고자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적어도 이항대립은 사라졌다. 관계 또는 관계함의 표상만이 남았다. 일방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정체의 부재, 부재의 현전으로의 표상, 모든 게 불타버린 후 간신히 유지해 오던 마지막 존재항으로서의 의자가 뒤집히는 순간, 그의 정체는 순식간에 드러났다. 그 전면적인 드러남이 오히려 당혹스러웠고 당혹스러움은 자신의 없음의 지점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도리어 지속 가능한 현존의 삶을, 있음의 있음을 새삼스럽게 밝혀낸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작가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의지다. 나 역시 그 속에서 순식간에 의자가 되었다가 또는 바닥의 어두운 공간이 되었다가 결국 뒤집어졌다. 그래서 나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라고 되물어본다. 나는 정말 말 많고 탈 많은 의자로부터 떨어져 나와 소모적 일상의 병렬구조에 한 지점으로 운위될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이제 미술은 오히려 그 자체로 미술 아닌 다른 어느 것도 될 수 있다, 는 식의 믿음을 유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된 셈이다. 그리기라는 지루한 반복을 통해, 아니면 어떤 또 다른 방식으로라도 말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인하여 부재/존재의 존재/부재를 증거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되새긴다. 이 쪽에서 저 쪽을 바라보며.


* 위 글에서 인용부호 안에 사용된 단어는 작가 본인의 글 중에서 따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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