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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01206. 두께의 형성에 대한 여덟가지 발언

by PrintStudio86 2017. 7. 10.

20001206. 두께의 형성에 대한 여덟가지 발언

2000 서신갤러리 겨울기획 06 20001206-1223

유대수/서신갤러리 큐레이터


겨울이다. 좁은 들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해 본다. 왜 길은 여기에만 있는가. 내가 밟고 서 있는 두 뼘 남짓의 폭, 아득한 직선, 행여 어느 갈림길을 만나 좌회전 아니면 우회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폭의, 그 길이의 길은 계속 아득하다. 좌측의 길과 우측의 길은 또 어디선가 다른 좌측의 길과 다른 우측의 길로 계속 나누어질 뿐이다. 그럼으로 확포장할 여분의 둔덕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오랜 시간을 망설이다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두께는 있는가, 되물어 본다.


있다. 두께는, 아예 너무 두터워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며 견고하기조차 해서 개선의 여지가 없기도 하다. 그것이 오랜 시간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그렇다고 애시당초 비껴가거나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만한 두께의 지층의 형성이란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기원의 기원으로부터, 인식 이전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역시 그 두께의 한 층에 부속되어 낑낑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본다.


고보연 作, 원근법적 연상기법-부드러운 오브제,각종 천에 바느질(2000년 作)


자신의 작업을 삶의 경험으로부터 다양한 연상작용으로의 이행하기라고 표현하는 고보연은 자투리천으로 상징되는 일상의 파편적 기억을 바느질한다. 말랑말랑하고 흐느적거리는 조그만 구조들이 만들어진다. 실상 이 구조물들은 확대하기에 따라서 거대한 놀이공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해 보인다.


김용련,, 도자·설치,각20×20×20㎝ 50개 (2000년 作)


김용련은 미술심리치료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작가다. 그의 조각적 언어는 단순한 공간의 재배치나 물리적 부피를 계산하는데 있지 않다. 자연물의 외형을 모티브로 삼되 그로부터 스스로 발아하는 내면의식을 쫓는다. 통제된 자아의 발견이나 발견된 자아의 다스림을 기대하는 것이다.


배용근, <남자 대 남자>, 동판·아크릴, 각45×12×75㎝(2000년 作)


배용근의 작업에서는 종종 스스럼없는 性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성을 통한 이항대립과 분열을 직시한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그 자신 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근원적 정체성을 묻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안윤, <野> 장지에 채색, 130×72.5㎝(2000년 作)


자연 속에서 자연의 평상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안윤의 수묵은 일견 자잘한 필치의 연속이 쌓여가며 하나의 군집을 형성해내는 식이다. 그것은 구체적 형상으로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삶의 반추를 통한 추상의 풍경에 가깝다.


오세나, <몽중도夢中圖>, 장지에 먹(2000년 作)


같은 수묵을 다루는 오세나의 夢中圖 연작은 꿈을 꾸는 듯한 몽환의 즐거움을 준다. 그림과, 그림을 지지하는 틀까지도 소근대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그의 조각그림들은 현실에는 없는, 부유하는 이상향을 향해 있다.


이일순, <밤>, 캔버스에 아크릴, 40.9×31.8㎝(2000년 作)


간결한 필치로 시적 서정성을 음미하게 하는 이일순의 화면에는 자신이 아이를 키우며 겪고 느낀 잡다한 일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삶의 진행 그 자체가 기호화한다. 그의 텍스트는 눈치채기 쉽다. 그는 아이와 대화하듯 그림과 대화하는 듯 하다.


이주리, <침묵>, 캔버스에 유채, 162.2×130.3㎝, 2000


이주리의 육체는 모호하다. 돌아설 듯 돌아서지 않는 모델의 시선은 오히려 화면 바깥을 응시하는 경우가 많다. 침잠하는 내부와 지향하는 외부의 충돌은, 그러나 가라앉을대로 가라앉은 침묵으로 다가온다.


이효문, <나는 날수 있다>, 나무에 채색, (2000년 作)


이효문의 나무조각은 절제와 균형을 보여준다. 추상적 공간과 질량에 탐하던 초기에 비해 애써 감정을 자제하고 정화된 개념을 표하고자 하는 듯 하다.


두께는 없다. 단지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길이 있을 따름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아무런 구심도 갖지 못하고 원심을 발할 수도 없다. 들풀의 새로운 종자는 연이어 태어나지만 그들이 뿌리내릴 자리는 협소하기 짝이 없다. 연쇄되지 못한다. 쌓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끼리 결탁하고 만다. 새로운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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