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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140629-지역당에 대한 짧은 생각(열린전북)

by PrintStudio86 2017. 7. 25.

지역당에 대한 짧은 생각 0630; 누가 ‘우리’의 삶을 만드는가!

유대수/(사)문화연구창 대표



‘시민후보’라는 말은 종종 들어봤지만 ‘주민후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런데 친근하다. 마을공동체나 자치운동이라는 말이 전달하는 익숙함에 비하면 ‘지역주민의 독자적 정치조직’이나 ‘당사자운동’이라는 말은 낯설었다. 그런데 끄덕여진다. 이건 뭘까 싶었다. 이 말들은 지난 6·4 지방선거에 네 명의 구의원 후보를 낸 ‘마포파티’의 경과를 설명하는 경향신문(2014. 6. 25) 기사에서 사용된 것들이다. 마포파티는 주민자치 마을공동체의 대표사례로 꼽히는 성미산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마포구민과 시민활동가들이 합심하여 구축한, 이를테면 ‘지역당(地域黨)’이라고 소개된다.


지역당이란 용어 역시 적어도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본격적인 지방선거의 출발점에 막 접어들던 지난 해 12월의 어느 날, 지역 정치판의 지겹고 지루한 제자리걸음에 다른 방향의 숨구멍을 뚫어내고 ‘지금, 여기’의 자존을 세우는 우리 식의 맵핑이 절실하지 않느냐는 열혈 방자한 토론의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앎이 미숙한 탓이다. 틈만 나면 ‘지역문화’라는 말을 남발하고 ‘문화作당’이라는 그룹 페이지를 생성했던 나로서도 한편 당혹스러웠지만 한편 제어하기 힘든 이끌림과 호기심에 ‘묻지마 00’으로 흡입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위계적 관리체계로서의 지방(地方)이 아닌 모종의 공통적 표상을 전제로 한 공간 구획으로서의 지역(地域)이라는 표현에 관성적으로 눈 먼 탓이 크다. 아직 당(黨)의 구체성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목표와 가치를 종잡을 수 없는 오락가락의 정치흥정을 견뎌야 했던 올 봄 내내 일상은 무너졌지만 지역당 얘기는 귓전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며 ‘이게 나라인가’라는 탄식을 듣고, 명백하게 허둥대고 뻔뻔하게 허술한 국가시스템의 좌초를 어이없게 바라보아야 하는 일과 동시에 시내버스 노동자의 난망한 죽음을 또한 뼈아프게 새겨야 했던 이 곳, 내 거주 연명 공간의 지리멸렬함 속에서도 지역의 생각과 지역의 문제를 지역이 말하고 지역이 풀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매력적인 당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치(政治)’와 ‘정당(政黨)’이라는 한국식 담론이 속박하는 두려움은 대체로 크다. 그런 일은 우리-나의 범위가 아니라 그들의 것-영역이라고 훈육된, 도리 없는 신체의 반응이므로. 따라서 ‘또 하나의 정치분파’가 아닌가 식의 우려나 속칭 제도정치의 선거 전략이나 후보전술 정도로 읽는 눈초리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예술이 곧 인류학’이라고 스치듯 말한 어느 선배의 생각처럼, 예술(행위) 자체가 곧 정치-행위라고 믿는 나로서는 이런 경우 매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만다. 대결하여 쟁취함으로서 의미를 획득하는 권력의 지점과 단련된 제도, 모듈화한 공공성의 바깥을 향한 자율적 탈주의 충동 지점이 채 교접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역당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와 정리, 접근과 시도를 주저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곰곰이 순서를 헤아리고 자발성과 능동성의 발화지점은 어디일까를 두리번거리는 과정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로자의 ‘저절로 나타나는 (대중의)힘’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이게 최종 문제일 것이다. 나의 경우 “지역에 대한 직접행동으로 지역을 재구성하려는 실천”이라고 답했다. 그러므로 ‘주민의 독자적 정치조직’이나 ‘당사자운동’이라는 말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역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앞선 사례들과 많은 분들의 발언 속에서 어느 정도 헤아려진다. “국가주의 권력의 독점구조를 뒤집는 지역 삶의 구체적-실천 가능한 대안메뉴 마련”이거나, “마을당과 사투리의 연합된 관계망”이거나, “지역의 변화를 바라는 삶들 간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산파”이거나,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이거나. 모두 동의한다. 나 역시 "자치공동의 삶을 추구하는 각 단위 영역별 실천전략(들) 및 행위(들)의 연대와 모듬"이라고 표현했었다. 멋진 말들임에 틀림없고, 동의하지만, 어려움과 헷갈림이 없진 않다. 과연 이러한 일들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우리의 삶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나의 삶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둥글게 모여 앉는 것"이라는 하승우의 명제로 보자면, 작금 지역당의 선결과제는 ‘모이는 것’이 아닌가. 모이되 각자의 삶의 현실 단위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동시에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둥글게 모여 앉는 것’이 단지 대면을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므로, 자유로운 개체들의 행위와 안팎의 연계와 공유의 연망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래야, 그 때 가서야 “‘차이’들의 ‘공동작용’”(고병권)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우선 제안될 수 있는 하나는 “짧게 보아 87년 6월 체제 이래로 각각의 진지를 만들어온 노력들-대안학교, 자활, 사회적경제, 문화예술활동, 교육, 언론, 자립자급의 삶, 귀농귀촌, 녹색-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만들자는 것”(강주영)이 될 것이다. ‘연합의 연합’이라고 표현된 이 상황을 나는 ‘메타포럼’이라고 칭한 바 있다. 무어라고 지칭하던지 간에 추구할 것은 자율과 연대요. 갖출 것은 “발칙한 상상과 발랄한 창의”(이재규)다.


좀 더 구체적 상황의 기획과 연출을 위해 몇 가지 실천양식을 상상해본다. 잘게 나누어진-따라서 의사소통과 의사결집이 빠른-소모임체(곧 지역당) 구성 운동. 이러한 ‘지역당(들)’의 삶에 공통되는 문제와 실천형식의 교환학습 필요성에 따른 유기적 연대. 연속된 의제 설정과 거침없는 토론장의 확보. 형성되는 담론과 실천되는 행위들을 배포하는 미디어 등. 이를 통해 지역의 삶을 실천하는 여러 조건들에 대한 상이한 ‘생각들’의 막힘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천변만화한 삶의 조건들에 대한 유연한 대응, 즉, ‘배제되지 않는 삶’을 향한 노력들이 만발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