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30-한옥마을 이야기 01. 한옥마을은 어떻게 한옥마을이 됐을까?
유대수 / (사)문화연구창 대표
전주한옥마을. 전주시 교동ㆍ풍남동 일대 한옥밀집구역을 이르는 말.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익숙하게 입에 붙어버린 단어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한지문화축제 등 굵직한 행사들과 함께 하며 때로는 공연공간으로, 때로는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의 실험적 창작 마당으로, 축제 참여자들과 문화활동가, 젊은 여행자들의 느긋한 휴식처로 마당과 길목을 내어주던 한옥마을은 어느덧 한해 관광객이 400만명(전주시, 2011)을 웃도는, 중고생들의 수학여행지이자 블로거들에게 각광받는 촬영지로 이름값을 다하며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한옥마을 조성사업이 시작된 2002년1) 이후 지난 10년의 세월은 이 공간을 놀랍게 변화시켰다. 길은 넓어지고 규칙적으로 잘린 대리석과 돌들이 그 길을 덮었다. 전신주가 사라졌으며 실개천이 흐른다. 전통문화관을 필두로 공예품전시관, 전통술박물관, 한옥생활체험관, 최명희문학관 등 문화시설이 지어지고 한집 건너 한집마다 카페와 식당, 기념품 상점들이 자리 잡고 관광객을 유혹한다. 낡았지만 소박하게 어깨를 맞대고 이어지던 한옥 살림집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우람한 규모와 번지르르한 자태를 뽐내는 새로운(!) 한옥들이 즐비하다. 원주민의 삶터, 곧 ‘집’으로서의 기능은 대부분 사라지고 민박과 게스트하우스로, 관광객을 위한 체험공방으로 성업 중이다. 주말이면 사람에 치어 걷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관광객과 시민들이 몰려 태조로와 은행로를 가득 메운다.
전주시민들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전주한옥마을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높아졌으며 덕분에 전주라는 도시 이미지, 전통문화도시 전주로서의 위상은 더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상업화와 하드웨어 중심의 개발주의가 문제라는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일단 성공적인 작품인 셈이다. 하기야 그간 한옥마을에 투여된 사업비만 해도 1999~2010년까지 총 947억원(국비280억, 지방비667억)으로 일천억원에 이른다니2) 실패했다면 더 이상하게 여겨졌을 일이다.
전주시가 관광산업의 주요 전략상품으로 바라본 한옥마을의 성과와 기대치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대통령자문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한 마을’로 지정받은 시기를 전후로 한다. 이에 더하여 2007~2009년 3년 동안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범마을분야’ 연속 선정, 2010년 ‘한국관광의 별’, ‘국제슬로우시티’ 지정, 2011년에는 ‘한국관광의 으뜸명소’로 지정받는 등 연이은 성과를 쌓게 된다. 전주시든 한옥마을을 터전삼고 있는 주민이든 이러한 한옥마을의 가시적 성과와 발전 현상에 한껏 고무되고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이렇게 가시적인 성공신화를 한 몸에 안고 있는 한옥마을은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한옥마을이 되었을까? 한옥마을 이전 교동ㆍ풍남동 일대의 형성과 변천사를 먼저 살펴보면 1977년, 한옥보존지구 지정 이후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옥마을은 공동화, 슬럼화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지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1930년대 일본인이 전주에 대거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식 주택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러자 이곳 주민 가운데 몇몇 부호가 중심이 돼 그에 대한 반발로 한옥마을을 형성했다.
(중략) 결국 1977년 이곳 한옥마을 일대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됐다. 한옥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역으로 마을은 급속히 공동화(空洞化)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략) 1990년대 말 규제가 완화돼 5층 이하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됐다. 불편했던 생활이 개선될 것 같았지만 이내 2000년대 초반 불어 닥친 참살이(웰빙) 열풍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의 국제행사와 맞물리면서 한옥마을 보존 여론이 다시 살아났다.3)
한옥마을이 급격하게 공동화된 이유는 도심 중심부에 위치했던 제조업이 도심 외곽으로 이전하고,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도심중심부가 점차 북서부로 이동해갔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에는 문화연필, 오일주장, 한흥메리야스(BYC전신), BBS운전면허시험장 등의 그 당시 전주시의 제조업을 이끄는 업체들이 모여 있을 만큼 경제적 중심지였다. 하지만, 1970년대 도시계획에 따라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으로 도시의 공간이 역할 배분되면서 한옥마을은 경제적 중심지의 역할을 상실하고 주거지역으로 변하게 된다.4)
이런 도심 공동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옥마을은 여느 도시 한복판에서 보기 힘든 한옥밀집지역으로 건축가, 인류학자 등에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으며, 부분적인 개조와 증축에도 불구하고 근현대 생활상을 미루어 살필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과 아기자기한 골목 등 ‘이야기’를 보듬고 있는 고즈넉한 거리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한옥마을의 모습에 먼저 반응과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파트와 대비되는 한옥마을의 전통적 생활양식은 이 지역에 문화활동가와 예술가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요소가 된다. (중략) 다문잔치는 쇠락하고 있는 한옥마을을 문화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새벽 늦게까지 떠들고 노는 ‘도깨비’같은 사람들은 점차 다문을 예술가와 문화활동가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취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거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5)
전주산조예술제는 전주한옥마을 전체를 놀이판으로 삼아 ‘오늘의 산조’를 찾아보겠다고 나선 전문음악축제였다. 산조라는 한국음악을 가지고 마련한 예술제였다. 하지만 예술제로서의 성격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옥마을의 바람직한 미래상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더 고민한 축제였기 때문이다.6)
필자 역시 이 시기 미술그룹 <작업실사람들>의 일원으로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한옥마을, 특히 찻집 다문을 드나들며 그 풍경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다문’과 ‘산조축제’7)라는 두 키워드로 그 시절 한옥마을을 기억하곤 한다.
1998년 고사동 오거리를 떠나 한옥마을에 둥지를 튼 다문은 이동엽과 박시도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사랑모임’ 활동을 바탕으로 월 1회 ‘다문잔치’를 여는 등 지속적인 문화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에 산조축제를 준비하고자 뭉친 박흥주 굿연구소 소장을 포함한 지역 예술인, 문화활동가들이 결합하고 뒤이어 마임이스트 최경식이 주도한 ‘마임축제’가 열리게 되면서 다양한 장르, 분야간 인적 교류의 폭이 넓어진 것은 물론 한옥마을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담론은 더욱 풍성해진다.
2003년 어느 날 마임을 하는 몇 명의 무리가 다문에서 술자리를 갖다가 다문사장과 더불어 그 자리에서 하룻밤을 놀게 된다. 그 때 즉석에서 다문사장이 장소를 제공 할 테니 당신들이 이곳에서 마임을 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그들이 받아들여 마임축제가 시작되게 되었다. 한옥마을이 전통이라는 장르를 넘어 다양한 문화적 실험이 이루어지는 창조적 문화공간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문잔치, 산조축제, 마임축제 등은 한옥마을에 산다는 것이 단순히 한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생활양식과 더불어 문화적 향유를 즐길 수 있는 곳에서 산다는 새로운 한옥마을의 문화적 생활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다.8)
특히 산조축제는 그 자신 추구했던 바 ‘판성의 회복’이라는 기치 아래 ‘산조정신’을 발현한다는 예술축제로서의 목표에 머무르지 않고 축제가 발생하고 이뤄지는 현장, 즉 한옥마을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며 이의 실천에도 상당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한옥과 대표건축물들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사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수차례의 토론회를 기획하여 그 정리된 내용을 전주시에 제시하기도 하고 당시 전주시장과의 간담회를 통해 한옥마을 조성사업의 로드맵과 전망을 공유하기도 했다.
제5회 전주산조예술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전주산조예술제조직위원회는 제2단계 전주산조예술제에 대한 3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그 계획안은 ‘전주한옥마을가꾸기에 관한 토론회’를 년4회 개최하겠다는 사업계획과 ‘전주한옥마을 관광프로그램 기획과 홍보’ 등을 주요 사업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단순히 공연중심의 예술제(축제)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주한옥마을 가꾸기(살리기)와 관광사업 및 홍보를 주요 사업으로 설정하여 한옥마을의 긍정적인 전망에 적극 동참함으로서, 전주한옥마을뿐만 아니라 전주시의 미래구상에도 선도적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셈이다.9)
이러한 문화활동가 및 민간전문가들의 선도적 움직임은 단순히 낡고 구석진, 도시 발전의 저해요소로 여겨졌던 한옥마을에 내재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했으며 문화적 취향을 함께 하는 전주시민들의 발걸음을 한옥마을로 흡인시키는 활기찬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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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한옥마을 이야기 02. 한옥마을 10년, 얻은 것과 잃은 것
유대수 / (사)문화연구창 대표
한옥마을에 들어온 문화활동가들이 한옥마을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생활양식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과는 다르게, 전주시는 한옥마을을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만들어 이곳을 새로운 도심관광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전주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전주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싶은 전주시는 한옥마을에 전통문화센터, 한옥생활체험관, 술박물관, 공예품전시관 등과 같은 전통문화의 공연과 전시 그리고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의 확충에 집중한다.10)
전주시가 전주한옥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했던 가장 큰 목적은 관광산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도 외부관광객 유치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관광산업과 더불어 문화ㆍ영화산업이 전주시가 앞으로 살아날 돌파구라고 인식하는 전주시민들이 이미 있어 왔다. 전주시에서도 이에 주목한 것이며, 한옥마을이 갖고 있는 전통문화와 한옥밀집공간을 관광전주의 전략상품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의 성과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셈이다.11)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바탕이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한옥마을을 주목하고 개발(!)한 또 하나의 축은 바로 전주시다. 1999년 전북대학교 채병선 교수팀에 발주된 ‘전통문화특구 기본사업계획 수립’ 용역을 기점으로 전주시는 한옥마을의 보존 및 육성사업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사업 초기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는데, 이는 지난 20여 년에 걸친 재산권 행사의 제한과 일상생활 조건의 불편함을 감수해온 데 대한 불만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주시의 의지 또한 강했다고 전한다. 결과적으로, 한옥마을의 외형적 공간을 변화시킨 주체는 문화예술가가 아닌 전주시였다.
과거의 관행을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직선화된 의식, 개발주의식 접근, 정책의 즉각적 가시화, 일괄타결식, 그리고 획일화된 마스터플랜 등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동주민에 대한 대책이 빠졌다는 것이다.12)
전주시는 표면적으로 개발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하드웨어 중심의 도시개발이 이뤄졌다. 그 결과 한해 300~4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 한옥숙박체험지로서 정착, 공방중심의 특산품 생산ㆍ판매거리 조성, 전통술박물관 등 문화시설의 신축, 일반시민들의 문화욕구에 부응하는 공간 조성, 국제슬로우시티 지정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옥과 전통문화를 상품으로 개발하여 관광산업화 하려는 전주시의 의도가 맺은 결실이다.
그러나 개발은 원주민들을 배제하는 방향이었다. ‘밤의 공동화’ 현상이 이미 초래되고 있다. 한옥이 갖는 주거지로서의 본질을 무시하고 거주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타자 지향의 개발은 관광지로서의 성격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3)
전주시의 의도가 구도심재생이든 관광산업이든 개발을 목표로 하여 결국 개발되었으니 어찌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개발 초기 민간 전문가 그룹이 제기한바 주민 소외, 지나친 상업화, 대규모 물량 중심 등 예상 가능한 문제들에 대한 적극적 대안 마련과 실천 의지가 부족했음은 분명한 듯하다. 한옥마을 조성 초기단계에서의 지적이나 최근의 검토에도 여전히 주목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주민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부족이다. ‘생활주거형 전통한옥’을 중심으로 진행하겠다던 조성사업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이런 전주시의 한옥마을 조성사업에 대한 의지는 당연하게도 한옥마을의 가치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던 문화활동가들의 기대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일정한 성과의 축적과 함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양 축의 긴장과 갈등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주시는 현재 한옥마을의 테마파크화를 추구하고 있고 이를 위해 다양한 상업자본과 손을 잡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된다면 뉴욕시의 소호가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한옥마을의 문화적 라이프스타일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한옥마을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한옥마을은 한옥마을의 문화적 취향을 소비하려는 중상류층과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산업자본의 천국이 되고 말 것이다.14)
지나친 상업화와 대형화, 한옥건축에 대한 원형성 논쟁, 지가 상승, 야간 공동화, 거주민 배려, 주차 문제 등 민간이나 행정을 막론하고 제기되는 문제들은 다양하다. 여러 언론기사와 한옥마을 10년을 맞아 치러진 포럼, 공청회 등에서도 다루어지는 의제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구도 역시 여전히 외형적 문제에 대한 관심, 하드웨어적 속성에 대한 관심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음이 엿보인다.
즉, 단층인 한옥마을 풍경을 저해하는 무분별한 2층 건축 행위를 제한하라는 주문, 주차시설 규정을 강화해 주차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제안, 한옥마을 내 차량 통제를 확대하고 가로 경관을 해치는 안내판이나 가림시설 등의 시설물을 규제하라는 제안 등이 나왔다. 한옥마을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며 경제적 성과도 낼 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들이다.
(중략) 많은 시 예산을 한옥 시설에 지원했지만,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부분에서 소홀했다.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었지만 대부분의 한옥이 상업 시설물이고, 간판 등은 일반 도심거리처럼 휘황찬란하기는 매일반이어서 볼썽사나운 게 많다. 일본식 가옥 흔적이 있는 건물도 남아 있고, 좁은 거리에는 '자동차 반 사람 반'이다.15)
한정된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 자리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작 한옥마을의 다음 10년에 대한 고민이 현상적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건물을 보고, 식사를 하고, 잠자리도 구했지만 그 다음 할 게 없다는 것이 세간의 중론이다. 말하자면, 지난 10년이 공간의 설정, 하드웨어 구축의 시간이었다면 향후 10년에 대한 예비는 내용물의 구성,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웨어의 실행과 안착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되어야지 않은가 하는 뜻에서 그렇다.
필자는 종종 한옥마을을 ‘미니어처’라 비꼬아 말하곤 한다. 이 말은, 한옥마을이 설사 그 외형(디자인의 과잉)과 관리(규제와 감독)와 산업화(자본 중심)의 지점에서 나름의 성과를 가졌다 한들, 우리가 어느 순간 그 공간을 주목하여 사용하고 즐기고자 했던, 그리하여 나의 문화, 우리의 정서로 체득하여 축적하고자 했던 본래의 장소성을 일정하게 탈색시켜 버렸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남은 것은 거대하지만 건조한 공간 이데올로기와 (세트장을 공개하여 얻어낸) 냉정한 개발이익의 성공신화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러므로 한옥마을 10년을 통해 얻은 것은 널찍한 도로와 돈이요, 잃은 것은 고샅길의 추억과 삶터로서의 마을이라면 너무 극단적일까. 슬로시티라는 명예와 한옥경관을 활용한 대표적 관광상품으로의 성공(!)이 왜곡되거나 가치절하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한옥마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는 저간의 형편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옥마을에 대한 접근법과 미래상에 대한 동상이몽이 낳은 결과라 할 수도 있는 이러한 평가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새로운 10년을 설계할 새로운 마당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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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5-한옥마을 이야기 03. 한옥마을, 다시 사람 사는 곳을 향한 10년의 상상
유대수 / (사)문화연구창 대표
2010년과 2011년, 유엔 총회는 ‘문화와 발전’ 의제를 주요 결의안으로 채택한다. 문화의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한다. ‘문화’와 ‘발전’은 과연 양립 가능할까? 여기서 발전은 물론 단순한 경제성장이나 산업화의 시점을 넘어 선 새로운 지점을 지시할 것이다. 정체하지 않는 지향과 지속으로서 ‘삶과 터의 문화화’에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그것을 실천하고 현재화시키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덧대어지기도 한다.
지금 ‘전주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은 성공한, 어엿한 ‘브랜드’가 되었다고 칭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한옥마을이라는 타이틀 가운데서 ‘한옥’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통과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옥마을이 갖는 이슈와 외부적 가치에만 집착한다.”16)는 지적에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전주한옥마을 이라는 장소의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서 한옥마을이라는 소재주의적 관심을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을 담고 있는 도시의 성장과정을 이해한다면 트렌드로서의 한옥마을에서 벗어나 장소의 특징과 문화적 가치들을 매번 새롭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거죠.”17)
한옥만 남고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화려하게 치장된 도로와 조경시설들과 상업공간의 범람 속에 그나마 공동체의 가치와 의미를 이어가려는, 전시효과로서의 문화시설만이 아닌 생활인들의 문화적 이해요구에 응답하는 행위의 연속이 부족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한해 500여만 명을 넘나드는 ‘관광객’이 찾는다 한들,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편의시설과 보여줘야만 하는 물리적 ‘꺼리’ 양산이 불가피하다 한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 사는 마을이자 마을 사람들이 아니던가.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마을에 내재된 원형질의 장소적 가치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은 문화로 가꾸어지고 쌓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한옥만 남고 마을은 사라져 가는 곳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단지 일회적 구경거리, 트렌드의 소비처, 사진발 잘 받는 곳 정도로 남지 않으려면, 다시 돌아와 여유로운 삶의 풍경에 안기고 싶은 긴 호흡의, 향수의 각인을 남겨주려면 지금의 형태와 위치로서의 한옥마을이 아닌 이야기와 장소로서의 한옥마을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공간과 장소가 다르게 인식되는 기준은 '경험'이다. 인간은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미지의 공간'을 '친밀한 장소'로 바꾸어 인식하게 된다. (중략) 21세기 관광여행의 경향은 '의미를 주는 여행', 즉 장소감을 소비하는 관광이다. 한옥마을 일대의 장소성은 약 100여 년을 통과하며 역사적으로 쌓인 귀중한 유산이다. 전주시는 그런 장소성을 없애고 새로운 경관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18)
시간이 좀 흘렀지만, 전북발전연구원이 제출한 <전주 한옥마을 조성사업의 도심재생 성과분석 및 개선방안>(2010)을 살펴보면, 한옥마을의 성과를 1)차별화된 보전정책으로 전통문화도시로서의 위상 확립, 2)주민의 동의와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구도심 재생의 모델 제시라는 두 가지로 대별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1)변형된 전통경관의 대응, 2)한옥마을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용도 제어, 3)지가상승과 주거기능 확보의 상충문제 대응, 4)재정적 지원의 대상과 기준의 재검토, 5)주민참여에서 주민주도형으로 마을만들기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5가지 향후 과제를 제시한다.
요컨대 가로와 건축의 변형에 따른 원형성 문제, 과도한 상업공간의 침투로 인한(게다가 지가 상승까지) 주거환경의 악화, 민간 중심 마을만들기의 필요성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최근에 눈에 띄는 한옥마을에 대한 언급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주 전통문화도시 발전 포럼’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문윤걸 교수 역시 “한옥마을의 정책 및 투자, 관광객 집중화로 상업공간이 확장됐고, 이로 인해 한옥마을이 상업중심 관광단지로 변형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고 한다.19)
전북일보 또한 <전주 한옥문화시설 운영 - 과잉 투자에 효과는 '글쎄'>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야간 도심 공동화 현상’과 ‘한옥의 가치’를 전하는 일에 소홀하다는 사실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최근 한옥마을 내 야간 도심 공동화 현상이 생기고 있다. 음식점·커피숍 등 상업화 시설이 자꾸 들어서면서 이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빠져 나가는 일도 많거니와 은행로와 태조로 중심으로 한 번화가와 저녁만 되면 인적이 뜸한 한지길이 확연하게 대조를 이룬다.20)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작 한옥마을이 한옥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문화재 보수 전문가 허만욱씨는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은 단순히 경관으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한옥을 우수성을 자랑해야 하는 마당에 한옥이 멋있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면서 "어느 곳엘 가도 한옥의 숨은 이야기, 그 이면에 있는 삶의 철학을 설명해주는 이들이 거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21)
한옥마을 내 위치한 여러 문화시설들의 유지 보수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한옥마을 앞뒤로 들어서게 될 국립무형유산원, 한국전통문화전당 등 대규모 시설을 생각하면 영세하기 그지없는 문화시설(그 곳에 근무하는 인력들의 상황까지도)의 향후 운영전략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전주문화의 모든 것을 이곳에 쑤셔 넣고 끝장을 보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렇게 과도한 지위 설정은 마을을 마을 자체로 보질 못하게 합니다. 사실 사람이 살고 그 삶이 이뤄지는 공간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하죠. 그런 평범한 사실을 망각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자꾸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되는 시점입니다.”22)
전주 한옥마을이 여러 민속촌의 한옥들과 다른 점은 아름다운 조형미 외에도 사람들과 함께 숨 쉬는 체험공간이라는 점이다. 솔뱅과 전주 한옥마을의 공통점은 바로 '박제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사람 냄새 진하게 나는 '삶의 현장'이라는 점이 아닌가 한다.23)
이러한 고민들을 압축해 표현하자면 아마도 ‘한옥마을 정체성 찾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필자 역시 이제 한옥마을에 필요한 것은 ‘장소성의 회복을 위한 이야기 만들기’라고 말하고 싶다. 최근 지역 문화예술계 내노라 하는 주당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한옥마을 숨은 10경’24)을 그러한 작업의 좋은 예시로 들고 싶다.
사실 ‘정체성’이란 말은 애매하게 추상적이어서 갑론을박이 심할 수밖에 없겠지만 한편으로 앞서 열거한 문제의 현상들을 뒤집거나 반대쪽에서 바라보면 생각보다 쉽게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 정체성 찾기의 출발점으로서 “문화시설에 한정된 문화마을이 아닌 마을의 전반적인 문화 욕구를 공간적으로 연결시켜 낼 프로그램의 개발 및 실현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지적과 “장소의 개념이 문화적 가치를 띤 곳에서 일상이 피어나는 진정한 삶의 공간으로 전이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충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누차 반복했지만 한옥마을이 그간 건져 올린 성과와 인지도 확보 등에 시비붙일 생각은 없다. 그것은 그것들대로 간직하고 이끌어가야 할 부분임도 당연하다. 문제는 앞날이다. 10년 전 가상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달려 온 결과값이 지금이라면 또한 현재의 또 다른 희망과 기대의 설계가 곧 다가올 10년 후의 모습을 만들어내지 않겠는가.
그런 뜻에서 기존의 문화시설들과 문화인력들의 노력은 배가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물론 큰 틀의 정책적 판단과 행정의 바른 자세도 필요하다. 원주민은 물론 유입된 상가주들의 의사표현도 중히 여겨져야 한다. 그런 삼위일체의 근거지형을 바탕으로 10년 뒤의 지도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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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2002년 2월 15일 제정된 ‘전주시 한옥보전지원조례(제2399호)’를 기준으로 함. 박흥주의 논문 <‘전주한옥마을 살리기’ 전략으로서의 축제, 그리고 그 역할-전주산조예술제를 중심으로, 2011> 참조.
주2) 전주시 문화경제국 한스타일관광과, 위의 글에서 재인용.
주3) 이현오, “한옥 상가가 아닌 사람 사는 ‘한옥마을’을 보고 싶다”, 방송대 신문 제 1662호, 2012. http://news.knou.ac.kr/news/article.html?no=24466
주4) 김동영, “문화의 창조성이 도시를 바꾼다”, 열린전북 2009년 7월호.
주5) 김동영, 같은 글.
주6) 박흥주, 같은 글.
주7) ‘전주산조페스티벌’로 출발하여 3회 행사부터 공식 명칭을 ‘전주산조예술제’로 바꾼다.
주8) 김동영, 같은 글.
주9) 박흥주, 같은 글.
주10) 김동영, “문화의 창조성이 도시를 바꾼다”, 열린전북 2009년 7월호.
주11) 박흥주, <‘전주한옥마을 살리기’ 전략으로서의 축제, 그리고 그 역할-전주산조예술제를 중심으로>, 2011.
주12) 김성식, 전주시 전통문화특구 지정에 따른 활성화 방안 모색을 위한 시민토론회, 2000. 박흥주의 글에서 재인용.
주13) 박흥주, 같은 글.
주14) 김동영, 같은 글.
주15) 전북일보 사설, 2012. 12. 30 인터넷판,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57748
주16) 희망제작소 도시재생 연속세미나 후기, <전주 한옥마을, 다시 마을을 이야기하다>, 2010. 5, http://prettier.egloos.com/3282136
주17) 위와 같은 글.
주18) 이경진, 삶이란 장소에서 일어난다, '장소와 장소상실' 서평, 전북일보, 2012,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51459
주19) (주)전북언론문화원 시사인터넷뉴스, 2013. 2. 27, ‘한옥마을 상업 관광단지 변형 우려’에서 재인용.
주20) 이화정 기자, 2013.01.23.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60027
주21) 위와 같은 글.
주22) 희망제작소 도시재생 연속세미나 후기, <전주 한옥마을, 다시 마을을 이야기하다>, 2010. 5, http://prettier.egloos.com/3282136
주23) 이승재, 솔뱅과 전주 한옥마을, 전북일보, 2013,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59321
주24) 기존 전주8경에 속한 일단 기린토월(驥麟吐月), 남고모종(南固暮鐘), 한벽청연(寒碧晴烟)을 포함하여 태조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고 전해지는 오목대에서의 바람의 노래 오목풍가(梧木風歌), 경기전 뜰에 쌓인 눈을 가만히 밟아보는 경전답설(慶殿踏雪), 전주 향교 처마 낙숫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뜻하는 교당낙수(校堂落水), 교동의 옛 이름인 자만동의 전설과 설화가 풀어지는 자만문고(滋滿聞古), 남천을 따라 느리게 느리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달의 모습인 남천유월(南川流月), 은행로를 흐르는 맑은 실개천을 이제는 남천이 대신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행로청수(杏路淸水), 굽이굽이 골목마다 쌓인 곡진한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한 우항곡절(迂巷曲折)이 그것이다. 소설가 이병천을 필두로 김용택·안도현 시인, 송하진 전주시장, 언론인 양창명, 한학자 이형구, 방송인 최태주씨 등이 가세해 정했다 한다. 전북일보 2013.01.07일자 참조,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58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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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수(1964~ )
홍익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서신갤러리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전라북도 홍보기획과에서 미디어홍보담당을 지냈다. 5번의 개인전과 60여회의 단체전, 기획전에 참여했고 현재 (사)문화연구창 대표로 있으며 전북민예총 정책위원장, 복합예술공간 차라리언더바 기획위원, 전북민미협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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