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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121120-나종희개인전-산에서 뜻을 묻다(문화저널)

by PrintStudio86 2017. 7. 25.

20121120-나종희개인전 시평

산(山)에서 뜻을 묻다 - 감춰진 의미를 찾아가는 노동으로서의 그림

유대수/(사)문화연구창 대표



그림은 종종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온전히 드러내고도 그 형태가 가진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또 다른 의미를 담아내거나 또 다른 형태를 짐작하게 한다. 정밀하게 묘사된, 주름투성이의 손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거나 강렬하게 그어진 풀잎에서 날카로운 칼의 속도를 생각하게 되는 경우라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객관화된 ‘사실(事實)’이자 동시에 ‘관념(觀念)’이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실재(實在)의 엄연함을 익히 알면서도 심상(心象)에 기대어 삶의 의미망을 넓히는 일에 또한 게으르지 않다. 그것이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시각을 시선에 머물지 않게 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어준다. 나종희의 산을 바라보며 우리가 찾아야 할, 찾아볼만한 뜻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그림의 조건이 아닌가 한다.


“나의 작업은 말 그대로 ‘work'이다. 그러고 보면 ‘산’은 실은 작업의 매개물인 셈이다.”라는 작가의 고백에서 느껴지는 바, 산은 그 자체 산의 뜻에만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무수한 노동의 결과로서의 산, 그것은 곧 작업을 시작하게 하고 작업을 이끌고 작업의 결과에 도달시키는 ‘매개물’이므로 우리는 그림을 대면하여 산-의 모양을 바라보지만 결국 산이 아닌 작가의 ‘work'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형태를 유지했으되, 여기서 지리산의 골격과 대둔산의 암벽과 모악산의 능선이 자연의 그것과 닮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작가의 심중을 이해하는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폭포의 직선과 푸른 금강산의 장대함이 화면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느냐 역시 길게 따져질 것은 못된다.


단지 “산 아래 웅크린 단단한 골조를 드러내보려고 했”을 뿐이라는, 그게 전부라는 작가의 소회는 그래서 남다르게 곱씹어진다. 일반의 회화적 태도를 건너뛰어, 회화와 조각의 경계 어느 지점, 질료와 육체와 정신이 뒤엉켜 한 몸으로 부딪히며 쟁투하는 그 치열한 공간에서, 작가는 단지 세계의 밑바닥에 가둬진 어떤 의미, 역사의 뼈대를 발굴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굴된 뼈대에 덧붙여질 살점들, 명료한 삶의 기억들은 아직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거칠되 정제시킨, 달리되 멈춰 세운, 평평하되 높이와 깊이를 유지시킨 작업은 회화적 환영이거나 풍경의 실체로서의 산을 밀어내고 반복된 육체적 개입의 흔적과 오래된 시간의 경과를 드러낸다. 그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 즉 작업은 “차가운 새벽의 노동”이자 “사위어가는 열정” 그 자체가 된다. 감춰져 있던 의미는 그로부터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작가의 “몸이 작동하는” 방식을 읽게 되고, “몸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에너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의미하는 것들)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탕-비밀스러운 기운을 간직한 ‘세계’로서의 나무와 그에 가해진 노동-빼곡한 삶의 질곡으로서의 상처가 연출해 낸 산의 등과 골은 붉고 푸른 색채를 만나 강렬한 율동과 파장을 가진 하나의 드라마가 되어 준다. 각진 상처들의 쌓임이 유연한 자세를 갖추며 제 자리에 틀어 앉기까지 이야기는 지속된다.


그 한편으로는 채 다하지 못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튕겨져 나와 잘려 나간 이야기라던가 전체를 위해, 결과적으로 평평해질 세계의 질서를 위해, 눌리어 묻힌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첨삭이나 세계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한 찬반과 호불호를 떠나 이러한 산-의 형태를 빈 작가의 고백에 덧붙여 우리는 우리만의 또 다른 이야기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정연한 질서 안에 거친 에너지를 가둬버린 것”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을 보충해내는 관람자, 곧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작업’이자 그림에 대한 예의가 되어줄 것이다. 굳이 ‘미술’이라 부르지 않고 그림이라 명명한 뜻도 여기에 있다. 그리기로서의 그림말고도 만들기-구축으로서의 그림이 가능하고 물질에 가해지는 작가의 투명한 정신-노동의 개입을 통해 기록되고 작성되는, 다시 말해 ‘살아감’의 그림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로서의 미술 이전에 과정으로서의 그림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길게 말해야 한다. 완료형 명사로서의 그림이 아닌 진행형 동사로서의 그림에 대해서, 드러난 현상 이전 또는 그 뒤편에 아직 발굴되지 못한 뜻-감춰진 의미를 찾아가는 노동으로서의 그림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한 각자의 그림들이 모여 삶과 역사의 지층이자 세계의 한쪽을 구성하는 당연한 입방체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산이 그저 산에 머무르지 않고 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여전히 우리는 산을 바라보지만 다른 뜻을 묻고 되새기며 삶을 다독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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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수

홍익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서신갤러리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전라북도 홍보기획과에서 미디어홍보담당을 지냈다. 현재 (사)문화연구창 대표로 있으며 복합예술공간 차라리언더바 기획위원, 전북민미협 및 전북민예총 회원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