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創)’에 대한 몇 가지 이해
2012. 08. 24 유대수
1. 전사(前史); 차라리 권력이 되자
○ 2006. 03. 20 다음카페 <3000project> 개설 및 운영
○ 2006. 10. 13~ 민족예술제(모악산 일대)
○ 2006. 10. 28~ 삼천갯강축제(삼천변 일대)
○ 2006. 10. 26 발기인총회(최명희문학관, 김성식 외 29명)
○ 2006. 11. 11 창립총회(최명희문학관, 김성식 외 29명)
○ 2007. 05. 17 공식 명칭 확정 - 지역문화정책연구소 (사)문화연구창(創)
○ 2007. 08. 20 문화연구창 법인설립 허가 - 전라북도 공고 제2007 - 793호 - 허가번호 : 제2007 - 57호
○ 2007. 08. 30 문화연구창 사무실 입주 - '자만재(紫滿齋)'로 당호 확정
(사)문화연구창(이하 창)의 출발은 ‘전북민예총 정책위원회(위원장 이정덕, 이하 민예총정책위)’ 활동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전 여러 자리의 마주침과 대화, 지역문화의 독과점과 부실함, 관료중심적 현상에 대한 결기세우기가 없지 않았으나 2005년 이후 이어진 민예총정책위의 주 1회 점심미팅1)을 통해 문화계 소장그룹(?)의 치열한 발언 장(場)으로 그 역할과 위치를 다진 결과라 볼 수 있다.
특히 2006년 민선 4기 지방선거를 맞아, 전라북도내 30여 문화예술단체가 참여한 <전라북도 문화예술정책 공약개발 대토론회> 및 출마후보자 협약식에 적극적인 기획 참여 및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민예총정책위와 전북지역혁신연구회가 공동으로 추진한 <531 지방선거 전라북도 14시군 문화예술정책공약 나눔사업>의 기획과 성공적 진행2)으로, 여전히 “젊은 실무자들” 또는 “일 시킬만한 후배들”의 위상이나마 지역문화계에 그 이름을 각인시키며 “이제는 우리가 힘을 모으면 뭔가 이룰 수 있겠다”는 활력(또는 동지애?)을 얻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쌓인 자신감(?)은 곧 이어진 민족예술제와 삼천갯강축제를 연출, 지휘하며 좀 더 단단해졌고, 지역문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보자는, 나선 김에 깃발 들고 뛰어 보자는 의지의 결속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가 곧 “사단법인 문화연구창”이다.
2. 사연들; 아지트와 나와바리의 세월
창 설립 초기, 소위 “8인방”3)의 움직임에 지역문화계의 반응은 다채로웠다. 기존 문화권력(?)에 대응하는 “앙팡테리블”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정책연구(소)라는 허울 뒤에서 기금사업이나 용역 수주 등 “돈벌이나 하려는 수작(?)”이라는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만 논다”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집단으로 찍히기도 했다. 하지만 창은 개의치 않았고, 아지트(자만재)의 열악함과 재정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인 만남, 치열한 음주가무와 함께 문화예술-운동에 대한 진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창의 구성원들이 가진 전공 분야가 다양한 만큼이나 성격(!)들도 다양했다. 그 덕분에 마치 금방이라도 세상을 점령할 것 같이 기세를 올릴 때보다는 격한 논쟁과 이해의 다름에 대한, 일종의 내분(!)으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던 일이 더 많기도 했다. 창은 그렇게 놀았다. 열심히. 지난 시간의 많은 일들을 이 자리에서 열거하긴 어렵지만 그 과정 모두가 현재의 창을 살아 있게 하는 자산이자 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초기 창의 활동은 주로 숨겨진 지역문화의 속살을 살피고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문화인력의 교류를 위한 “네트워크”에 주력했다. 2008년 14시군 문화활동가와의 격의 없는 만남을 목표로 실행한 <지역문화순회포럼>4)과 2009년 벽두의 <두레강좌> 등은 창의 기반을 넓히는 기회였던 동시에 지역문화에 대한 고민과 숙제를 더 풍부하게(?) 해준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 또한 2009년 <인문학동행> 이후 지속되고 있는 인문예창 역시 문화예술과 인문학의 결합이라는 모토와 이슈파이팅 이외 형식치레를 탈피한 “네트워크”의 확장과 심화라는 목표를 여전히 새기고 있다.
3. 지금, 여기; 창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창은 창립총회를 기점으로 올해 11월이면 6년을 맞이한다. 치열한 각개전투와 피나는 합심의 노정이었다. 2011년, 효자문화의집을 수탁하고 전라북도 문화바우처사업 주관처로 선정된 창은 사업 영역의 확장과 가용 인력의 확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아 지금에 이른다.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열정, 의리, 기개가 넘치던 초기 단계의 논의방식과 맞비교하긴 어렵지만 현재하는 창의 존재방식에 대해 높은 점수를 매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다. 무엇으로 우리는 창에 붙들리는가에 대한 초점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깊숙하고 또 길게 이어질 담론장의 구성에 대한 합의 수준이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규모는 커졌지만 뭔가 허전하다. “창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사라졌다. “지역문화”의 변화와 진로를 읽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철학논쟁도 발견하기 힘들다(물론 이 점은 단지 ‘창’만의 문제는 아니다).
도대체 창의 “지금, 여기” 위상과 역할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원도연(2008)에 따르면 창의 초기 구성원 대부분은 지역문화 3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5) 그렇다면 지금은? 이 논지를 잇는다면 창은 3세대와 4세대가 혼합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4세대의 행보를 견인하는 ‘프로젝트’의 과정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3세대의 역할과 기능이 아직은 뒤로 물러날 때가 아니라는 점은 당연하지만 향후 창이 기획해야 할 여러 프로젝트 중 하나는 “4세대 문화인력의 발견과 확장에 대한 전략 마련”이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안정된 재정 확보를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사업’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단적으로 말해 창은 ‘기획사-업체’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연구와 이를 활용한 네트워크 구축 및 정책 제안”이 핵심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문화 전반에 대한 현장 탐색은 세심하고 각별해져야 할 것이다. 창이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을 살펴보고 하는 일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향후 설계될 “창립 6주년 기념행사”가 바로 그런 과감한 시도들의 기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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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전북대학교 인근 백제로변 ‘청라회관’을 주로 이용했다. 또한 몇 명의 위원 교체에도 불구하고 개최율 90%, 참석율 90%를 웃도는 집중력을 자랑했다.
주2) 이 당시 정책위원장에는 이정덕 전북대 교수를 비롯해 김성식(민속학), 김선태(전북민예총 사무처장), 유대수(큐레이터), 이준호(삼천문화의집 관장), 진명숙(문화인류학), 최기우(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세부내용은 전북민예총 기관지 [품] 특별호(2006. 7)에 실려 있다.
주3) 민예총정책위 활동과 섬천갯강축제를 통해 만나게 된 김성식, 유대수, 김선태, 이경진, 이준호, 김인득, 최기우, 김영신을 말하며 법인 설립 당시 이사로 참여했다. 추후 지용출이 별도의 서류절차는 없었으나 기존 이사회의 동의아래 이사 자격으로 각종 회의 및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주4) 정읍(3. 27), 군산(4. 25), 진안(5. 29), 고창(9. 19)을 순회하며 지역별 평균 10명 내외의 활동가들과 대화를 가졌다. 이후 2009년 완주간담회(5. 28)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주5) “결국 현재의 과정은 해방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지역문화를 이끌어온 예총 중심의 1세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대안문화 및 민예총 계열의 세력들에 이어 3세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08. 12. 1. 2009년 전라북도 문화정책의 핵심쟁점과 대안. 원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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