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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111123-전북을 살다 간 예술가(예총)

by PrintStudio86 2017. 7. 25.

[전북예총-전북을 살다 간 예술가]

판화로 읽는 전주의 숨결

유대수 : (사)문화연구창 대표



예술-작품은 결과적으로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드러낸다. 예술가의 눈과 가슴을 통해서다. 이성(理性)으로 재단하기 힘든 삶의 바탕은 그렇게 우리에게 현상(現像)한다. 예술가가 읽어 준 시간과 공간은 또한 그 때, 그 사물의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사물의 위치와 예술가의 위치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역사 위를 걷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화려한 축제와 예향의 도시라는 이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전주의 참 아름다움과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이곳에서 보고 자라난 이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에 숨어져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보고 싶었다.

<지용출, 완산을 보다, 제8회 개인전 서문, 2004>


전주에서 나지 않았으나 전주의 삶을 온전히 살다 간 예술가가 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그 때의 시간과 공간을 어림한다. 서울 토박이였던 故지용출이 전주 생활을 시작한지 17년, 한동안 이방인의 도시였던 전주가 제2의 고향이 되어 갈 즈음 “전주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경점(景點)”에 올랐던 그는 지금 여기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발로 걸어 땀으로 새긴 판화가 오롯이 남았다.


2010년 5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달리 한 판화가 故지용출은 2004년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완산을 보다>라는 제목으로 여덟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도시의 아스팔트와 매연과 바쁜 일상 속에 가려진 전주의 숨결과 혈맥을 찾아” 옛 지도의 표현방법을 빌린 판화작품을 발표했다. 전주의 완산칠봉을 중심으로 남고산, 오목대, 관성묘, 전주천 등을 걷고 또 걸어 온몸으로 부대낀 결과물이었다. 역사와 전통과 화각(畵刻)이 하나로 만나는 시간이었다.


되풀이되는 행보로 지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자료조사를 하면서 밑그림을 그려 나갔다. 지난 역사의 흔적들을 선택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서있는 이곳 전주가 바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에 가슴 벅찬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문명을 발견한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감동이었다. 현대문명의 속도성과 일직선적 방향에 익숙해졌던 나의 오감은 전주라는 도시의 역사적 흔적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옛 지도의 형식을 빌었다. 여러 번의 행보로 얻은, 여러 곳에서 바라보고 그린 밑그림을 연결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그것은 가려진 곳을 드러내는 작업이었고 진실된 역사와 숨결, 정신을 담아내는 과정이었다.

<지용출, 완산을 보다, 제8회 개인전 서문, 2004>


전주는 어떤 곳인가. 견훤이 도읍을 삼아 대업을 꿈꾼 곳. 동학군이 집강소를 차려 자치와 개혁의 표상을 세운 곳. 호남제일성. 무엇보다도 온전한(完山州, 全州) 땅이다. 수령으로 온 벼슬아치는 토박이 아전만 못하고, 아전들은 기생만 못하고, 기생들은 음률풍류만 못하고, 음률은 음식만 못하다 했던가. 소리와 맛과 멋으로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곳이 또한 전주다. 그런 전주의 고고한 숨결이, 추상(抽象)의 ‘~스러움’이 한 폭 구상(具象)의 정경(情景)으로 그의 작품에 옮겨져 있다.


전통 부감법과 다초점의 미감으로 이루어진 그의 판화는 광활한 조망에 덧붙여 소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의 세세함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고지도의 판법과 채색을 응용하고, 위성사진을 살펴 덧대어주고, 산세와 물줄기의 앉음새를 꼼꼼히 익힌 다음 강조와 축약을 적당히 배려한 결과다.


관성묘를 묘사한 작품에서는 그 너머 기린봉까지 은은하고, 중바위 꼭대기로부터 흘러내린 기운이 진북사를 지나고도 한참을 넘실댄다. 그 이전 작품들이 일상의 사물 자체에 바짝 다가가 확대된 낱개의 표정을 담은 것이라 한다면 전주를 배우고 전주를 그리고자 한 시기의 작품들은 관조와 음미를 내세워 한 발 물러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와 현재,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보고 함께 살리는 일, 쉽지 않은 조형의 눈을 그는 지녔던 것이다.


전주를 걷고 전주를 그린 화가와 작품이 어디 한 둘 일까. 그래도 그의 판화를 보며 우리는 바쁜 걸음, 용머리고개에서 쉬어가고 오목대에 올라 봄을 맞이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의 판화 덕분에 한벽당에서 듣는 전주천의 소살거림으로 곧 예향 전주임을 느끼고, 향교 은행나무 곁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관성묘에 올라 관운장의 쩌렁한 호령에 가슴을 씻는다.


전주는 전주천의 흐름에 씻기고 닦여 왔다. 지금은 오래 전처럼 삶의 애환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전주 문명의 밑거름과 그 풍류에 녹아있는 풍부한 정서를 전주천은 영원히 간직하며 흐를 것이다.

<지용출, 문화저널, 테마기획, 2004년 12월호>


그의 말마따나 전주천의 고고한 흐름에 씻기고 닦여 온 전주를, 문명의 밑거름과 풍류를 간직한 전주의 질박한 호흡을, 우리는 그가 남긴 판화 속에서 새삼 되새기게 된다.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차마 눈길 거두지 못했던 사람. 전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전주를 끌어안고 그 깊은 체취를 제 몸에 새기려 했던 사람. 故지용출의 삶을 통해 전주를 본다.


*이 글은 전주문화원 소식지에 수록한 <판화로 읽는 전주의 숨결>(20110720)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재수록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