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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41226. 그럴만한,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메모

by PrintStudio86 2017. 7. 10.

N° 3

DECEMBER.26.2004_DECEMBER.27.2004

GAFF

golbAng aRt fiLm fesTivaL

징후와 징조 sympton & sign

2004_12_26(sun) 13:00 √_전위예술의 플럭서스Fluxus 필름 상영

_플럭서스 예술가들과 플럭서스 필름에 관하여

2004_12_27(mon) 13:00 √_Amores Perros 상영

_전영화담 電映畵談

장소_홍지문화공간(홍지서림 지하) 



그럴만한,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메모

2004. 3th골방-전영화담-징후와징조

유대수/판화가


 

1. 그물에서 헤엄치기


고기떼, 그들은 별 생각 없이 무리지어 헤엄칠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로 던져진 거대한 그물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서히 수면 위로 당겨지는 그물-그물을 ‘당기는 힘’-에 갇혀,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완강한 죽음만을 기다릴 뿐 다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는데 말하자면 이런 삶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채 그저 그렇게만 보이던, 그래서 진부하다고 느낀 바 있는 흔해빠진 어떤 것들에 다름 아니다. 그물이 던져지기 전, 그들은 어디까지 자유로운 영혼이었을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난 밤 어디에선가 떨어져 나간 비늘의 쓰린 상처-추억마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법, 바로 그 추억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이 자리에 ‘있음’을 증거 할 무슨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 때 누군가 소리쳤다. “아래로 헤엄쳐! 모두 아래로 헤엄쳐! 우린 할 수 있어!” 그랬었군. 그래서 그들의 머리가 일제히, 그들의 꼬리가 한꺼번에 오직 한 쪽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어쩌면,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모종의 ‘힘’에 의해 ‘지시된’ 결과라고 보이는데, 단지 중력의 작용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어 본다. 힘을 힘으로 제압하리라는 생각은 또 누가 했을까? 풍만하게 둥근 포물선에 대항하는 예민한 직선,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일거의 단일함을 도대체 언제 깨달은 것일까?


그리하여 그물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한 방향으로의 질주(!)에 견디다 못해 무기력하게 찢어지고야 말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보자면 그물을 당기던 ‘힘’이야말로 애당초 인정사정없는 질주가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향하여 억울해 하거나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서로의 사는/살아가야만 하는 위치와 태도와 자세가 약간 어긋나있던 것일 뿐이므로, 당사자 모두가 이의 없이 이제까지의 위치와 태도와 자세를 지속시키리라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지속되지 않는다면, 또는 지속시키지 않겠노라고 튀어나오거나 미끄러진다면, 그 순간 삶을 구성하는 인지의 각도가 달라질 것이 뻔하므로 관계의 교차점은 달라질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세계가 달라지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저 먼발치에서 관망할 뿐인 나의 세계조차도!


결국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모든 자유’를 얻었다고 보기에는 뭔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다. 그 제자리가 진실로 이전의 그 자리와 동일한지도 자신할 수 없다. 설사 그들이 거칠 것 없이 온전한 바다로 돌아왔다 한들 또 다시 별 생각 없이 헤엄쳐야 하는 일만이 기다리는 삶이라면 더 더욱 그렇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별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다른 일상조차도 모조리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날렵한 감각과 팔딱거리는 육체의 역동과 환희 같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뒤섞어, 자폐와 독선으로 방만한 이 세계의 구석에 방치할 생각도 없다. 포획의 그물망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루하고 남루한 일상, 어딘가에 쳐 박혀 떠난 적도 돌아온 적도 없는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그들은 나와 동류일 것이 틀림없으며 바다-다시 돌아온 제자리가 결코 그물망이 아닐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2. 그럴만한 인생들


“순 개판이로군.”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임에도 끝까지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덕분에 오직 화면의 구도와 색채, 인물의 표정 따위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냥 불쑥 내뱉은 말이 이러했으니, 무모하게 막나가기만 하는 인생들을 못내 한심스러워하며 바라보았을 내 눈빛이야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미리 고백하건대, 몇 사람-삶들의 ‘개’같은 질곡에 비하면 지겹게 자주 눈에 띄는 개들의 ‘개’같은 운명이야말로 오히려 정상적인 관계-존재항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만도 못한 삶’을 버거워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미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 스스로의 희미하기만 한 근거들, 의미의 여백도 채 메워내지 못하면서도 타자의 미래를 희망하고 그리하여 저 쪽의 다른 세계를 품어 보려는 얄팍한(!) 수작들이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 역시 ‘사랑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나의 사랑만큼은 신파가 되지 않겠노라고 제 아무리 다짐한들 그 약속이 쉬이 지켜지는 예를 그다지 보지 못했다. 말하자면 ‘멋진 신세계’*를 향한 단 하나의-하나일 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출구를 만들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하는 옥타비오의 눈빛은 기회만 있으면 숨을 헐떡이며 다가가 형수의 팬티를 끌어 내리는 손길에 비하면 훨씬 덜 솔직하다. 바로 그 멋진 신세계의 문턱에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내달릴 수도 없게 무참히 부서져버린-부서졌다고 믿는- 다니엘의 낭만이 그저 연인의 개를 부여잡고 속울음을 삼킨다고 해서 갑자기 숭고하게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는다. 쓰레기처럼 지쳐가는 실패한(!) 혁명가의 진실은 차라리 자본가의 살인청부를 받으며 낄낄거릴 때 더 두드러진다. 나는 아직도 개들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지던 치보의 얼굴을 마르크스와 게바라를 반쯤씩 섞어놓은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나로서는 텅 빈-아무 것도 장치되지 않았으므로 무엇으로든 될 수 있는- 세상으로의 기약 없는 여행을 시작하던 그의 반반한(!)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하다.


사실 사랑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같은/다른 시간과 다른/같은 공간을 교대로 점유해 가며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삶을 불필요하게 조직(!)하고 있는 지점에 있다고 보인다. 아니다. 세계의 구조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꾸로 그들은 단지 자신의 현재에 충실하게 몰두했을 따름이라고 고쳐본다.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흘러간 시간은 고작 하루일뿐이다. 어제도 겪었으며 내일 또 다시 반복될 소지가 다분한 그런 시공간의 주름살일 뿐이라고, 모두가 현재를 떠났으되 사실은 아무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실패한 혁명가만이 상대적 예외일 수 있다면, 그래서 아직도 세상은 꿈꾸어볼만한 곳이라고 넌지시 가르칠 양이라면, 그의 떠남으로 인해 유추될 멋진 신세계에의 미련을 여전히 떼놓지 못하는 작가의 순정한 의도를 받아줄 수는 있되 나까지 동반하여 그 길에 끼어들 의향은 거의 없다.



3. 그렇지만은 않은 어떤 것들


끈적거리는 피, 속도, 무차별한, 광기의 증폭을 위해 자주 끊어지는 시간들. 그 속에서 문맥을 놓치고 싶지 않아 제법 애를 썼지만 긴장할수록 자꾸만 나른해진다. 낯선 작가의 낯선 그림들을 읽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사람들이 튀어나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들을 내뱉고 있을 뿐이라고 느낀다. 그 어색한 익숙함의 정체는 뒤로 갈수록, 분절되어 버려졌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되돌아와 촘촘히 조직되기 시작하면서, 내러티브의 총합을 어렴풋이 눈치 채면서 간신히 짐작되었다. 내가 나를 투사하고 회상하는 일이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남한의 ‘팔십년대’를 조목조목 되짚어야 하는 일이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말이다.


그리하여 모든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들이 세계의 진보를 감당해낼 수 없어 잘게 조각나는 바로 그 파열의 현장에 서서, 무엇보다도 더 붉게 흐르는 피의 분노를 그까짓 몇 다발의 돈뭉치가, 형수와 연인과 딸에 대한 맹목의 정처 없는 사랑이, 사람보다 더 애틋하게 헐떡거리는 옆구리의 총알구멍 따위가 어찌 감당해 낸단 말인가! 있을 것은 다 있는 세상을 가진 것 하나 없이 빈 몸의 생채기만으로 살아내는 인생들의 스산한 풍경을 지켜보며 그래도, 분명 그렇지만은 않은 어떤 것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노라고 믿어 본다. 이 쪽과 저 쪽을 모두 아울러 체화해 낸 척(!) 하며 초라하게 멀어지는 전직 혁명가의 회한이 지겨운 나는, 이 득도와 고행의 발걸음이 기껏해야 ‘모더니티의 실재’라거나 ‘포스트 무엇’이라거나 따위의 ‘매듭’일 수밖에 없다면, 다시 교차로에 돌아가 더운 피 한바가지를 보태야 할지도 모른다고 되새김한다. 그럴만한 가치의 유무를 고려하기 이전에 그렇지 않은 어떤 것들이 이미 있었노라고 속삭이며, 그 길바닥에 턱없이 주저앉는다 한들 상처에 덧씌워진 다른 상처의 껍질이 더 이상 말랑거리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떠나거나 돌아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저 살아간다. 반대로 말해도 마찬가지다.


주)......................

*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신세계와는 또 다른 뜻으로 사용했다. 역설인 셈인데, 읽는 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음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