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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40416. 느리게 사색하는 연습-그 겨울나기

by PrintStudio86 2017. 7. 10.

20040416. 느리게 사색하는 연습-그 겨울나기

문화저널 2004년 5월호 [전시리뷰] 제 2회 김영란 개인전/20040416-0422/전북예술회관 1층 2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삶은 언제나 이후의 삶을 위한 '원형적 존재'가 된다. 원형은, 예비된 순환을 위해 채워진 어떤 것들을 스스로가 기꺼이 지워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재생과 환원, 자기 치유의 맥박을 지속시킨다.


뭇 생명들의 고요한 침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런 재생과 치유의 순환 고리를 더욱 촘촘하고 섬세하게, 그러나 유연하고 느릿하게 지켜내고자 하는, 저채도의 색조를 켜켜이 쌓아가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문하고 자답하는 관조적 정서에 고정되어 있다.


화면은 공허하며 고요하다. 넓이나 두께 식의 척도보다는 깊이에의 무한한 연상을 작동시킨다. 지금의 비어있음으로부터 실낱같은 생명의 희망을 기대하는 일이, 일상의 속도로부터 비켜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겨울나기라는 게 어쩌면 그럴 것이다. 그렇게 가라앉은 화면은 다만 사색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이미 충분한 여백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서 공허하다는 말은 그런 작가의 사색의 여백에 대한 의미의 부정이 아니다. '존재조차 희미한 작은 부피의 풀들', ‘한때는 윤기 있는 초록이었으나 지금은 노인의 손등에 핀 검버섯처럼 메마르고 볼품없는 낙엽들'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일상적이어서 시야에 잡히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확대되어 눈앞에 다가설 때' 흔히 느낄법한, 다중의 이미지로 가득 찬 시각의 직진성에 관련한 것과는 반대로 내 등 뒤에 텅 빈 채로 남아있는, 겨울날의 바람 없는 공간에 관련한 진술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더 어울리겠다.


그러므로 이 담담하기 짝이 없는 여백의 형성은 발걸음의 촉감을 담지하는 대지에의 비유보다는 중력으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창조적 의지로서의 하늘에 연루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시점은 종종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적 물리의 구조화라든가 정치적 개념의 서술 등과 같은 점진적인 외향의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부를 향하여 은밀하게 함축시키는 존재론적인 의미망의 내향적 구성에 더 치중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 취지의 공허함에 비유하자면, 이를테면 이 작가의 화면 운영과 공간 구성은 채우기보다는 '비워내기'에 가깝다. 말하자면 채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양의 색조가 누적될수록, 어쩌면 새로운 생명의 끈-근거로서의 백색 선묘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보이는 지층의 탐색과 다지기라 할 '쌓아가기'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온 일상의 소소한 욕망을 버리기 위한, 억지스러운 인위와 부자연한 조합들을 풀어내기 위한, 지나온 세계의 충동적 환영과 억압의 연쇄들에 대한 '지우기/버리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는 말이다.


애초에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가 텅 빈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모두들 이해하듯이, 이런 식의 비워내기란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 비하여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비워진 공간에 얼기설기 놓여진 하얀 선들-언젠가는 초록의 생명을 매달고 있을 것이 분명한 나뭇가지이자 넝쿨이며 뿌리인-의 추상은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미백의 선언적이고 감상적인 형식논리적 추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을 지우고 비워낸 후에 남겨지는 방식으로, 존재들의 원형으로 지시되기 위해 상상 가능한 여분의 형태소를 채 그려내지 않았다 한들, 아직 그것은 익숙한 생활의 감정에서 떠오르는 리얼리티에 가깝다. 리얼리티의 본의가 굳이 재현의 사실성이라는 닫힌 개념으로만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세계와 유리된, 자신으로부터 유추된 호흡의 공간에서 체험된 낱개의 감정들을 집합적으로 반추해 내는 장치로서의 그리기-실제로는 화면 자체를 긁고 새겨서 백토를 채운 다음 표면을 다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가 대개의 경우 감정의 과잉을 참지 못하고 난삽하거나 오도되며 격렬해지는 것들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런 식의, 감정의 절제를 통한 작은 사물과의 대화는 자신과 대상을 동시에 투사하는 현재성을 내재하므로, 굳이 이름하자면 '관념적 리얼리티'정도가 되겠다.


이러한 감정이입의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작가가 발언하고자 하는 작업의 총체를 느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전의 몇 작업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보자면, 훨씬 더 잘 다듬어지고 세련되게 구성된 화면의 아름다움은 두드러지는 '여성'적 특질의 미감과 장식적 효과의 매끄러움이라는 취약성에 비하여 안정적인 내러티브의 구사와 균형감 있는 화질의 운영이라는 장점이 더 앞서감으로 인해 충분히 양보되어질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는, 짐작컨대 자신의 삶의 몇 요소들과 작품에 등장하는, 작품의 소재가 되어 준 뭇 생명체들과의 정서적 교류에 상당히 민감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작가들이 갖는 자연에 대한 경외의 감정이 그러겠거니와, 빈 가지 끝 드러내고 홀로 서 있는 나무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고, 묵묵히 서 있는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어느 산길에서 무심코 꺾어 옮겨 심은 산국화가 거실 한 모퉁이에서 시들어가는 모습을 애처로워 하는 마음으로부터,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의 순정한 감수성-물론 약화시켜 말하자면 '소녀적 감수성'이기도 하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연을 순환하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과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인고의 과정이 내포하는 희망에 대하여 풀어내는 작업의 표상이 또한 그러하다.


적어도 나의 눈에 그런 종류의 감수성이 유독 강조되어 읽히는 것은, 작가 스스로 생명을 낳아 키우는-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 줄 것이 틀림없는- 어머니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연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끄럽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차분하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주고 있는 그의 침잠한 화면을 통하여, 무언가를 지극하게 바라보며 사랑하고 산다는 일, 더불어 그 감정을 색채와 형태라는 미술적 언어를 빌어 이미지로 표상시킨다는 일이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니라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금 숙고하며, 작가 본인의 말마따나 조급하지 않게, 느릿한 호흡으로 다음 삶을 희망할 줄 아는 자연의 생명들처럼, 한걸음 멈추고 느릿하게 사는 연습을 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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