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23. 天竺國에 대한 112개의 風景畵
문화저널 2004 01호 시평. 다섯사람 여행도/031217_1231/서신갤러리
1. 인도
"인도 印度 (India), 남부 아시아에 있는 나라. 수도는 뉴델리, 언어는 힌디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한다. 면적은 316만 6414㎢, 인구는 10억 476만 1000명(2002). 아시아 문명의 원천으로 불교가 발상한 곳이며, 천축(天竺)이란 이름으로 예부터 알려진 곳이다. 1974년 8월 15일 3세기 반에 걸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한 민주국가로, 영국 연방을 구성한다. 국토면적은 세계 7위, 인구는 세계 2위, 나라꽃은 파파베르이고 통화단위는 루피(Rupee, Re)를 쓴다."
인터넷 검색창에 '인도'를 집어넣으면 0.5초만에 접하게 되는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인도를 다 말할 수 없다, 고 느낀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이것은(이 정도는) 인도(의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빌어 그럼 인도의 숨겨진 다른 모습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식의 토론이나 문답을 나누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선 나 자신이 그럴만한 지식이나 경험을 갖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에 가본 적이 없으려니와 특별한 관심으로 인도에 대해 탐색하고 주의를 기울여 본 적도 거의 없다. 아마도 몇몇 사람의 여행담을 통해서, 아니면 밴디드퀸이나 시티오브조이같은 영화를 통하여 기억된 몇 장면을 편집하여 떠올리는 정도만이 내가 가진 인도에 대한 편견(!)의 전부일 것이다.
다만 인도에는 분명 또 다른 무엇(대체적으로 신비하거나 심오하며 현학적인)이 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색으로 치자면 인도는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회갈색이거나 약간 탈색되어 구겨진 오렌지색 정도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 곳에서는, 모든 시간의 흐름이 여기보다 세 배쯤 더디게 갈 것이기 때문에 공간을 제어하는 힘과 속도 역시 그 만큼 느릿한(그러나 무거운) 압력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모든 사람들의 미간에 제 삼의 눈이 달려 있어(물론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 바라보는 이의 심장을 투명하게 관통할 것이라고, 그렇게 인도는 존재를 철학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추정할 뿐이다.
그리하여 인도는 계량적 수치로는 측정하기 힘든 몸과 몸 사이, 이 곳과 저 곳 사이, 의식의 빈 틈 어딘가에,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상태로 아련하게 정박해 있다.
2. 그림들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에, 다섯 화가의 旅行圖는 이런 나의 편견을 바로잡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인도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많은 것들이라니, 인도에 관한 구체하고 전반적인 섭렵을 말함이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이 이번 전시는 말 그대로 여행의 기록일 뿐이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다시 저 곳에서 더 멀리 떨어진 어떤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흐르는 이런 종류의 여행에서 구체적이거나 전반적인 많은 것들을 담아내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여행이 가지는 시야의 한계는 곧 다큐멘터리의 한계적 시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물들은 본격적인 논문이나 해부도가 되고자 한 바가 아니므로 당연히, 말하자면 가벼운 '시각 이미지의 채집'이자 스쳐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상의 낙서'로 배열될 뿐이다. 아직까지는, 여행 중에 스친 인상적인 기억의 편린을 되새김하는 일종의 감탄사로 잠겨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볍게 보인다고 해서 가치가 없거나 구성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채집된 이미지들은-비록 짧은 시간에 슥슥 그어나간 간헐적인 필치와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리적 글이나 말에 비해 훨씬 더 그 장소와 그 시간과 그 삶의 근원적인 풍경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선명하게 담아내기도 한다. 이번 여행도를 함께 그려 낸 다섯 화가의 면면이 그리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갖춘 고수(!)들이라는 점을 참조한다면 이 점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이미지는 어떤 원형이나 모델을 전제하는 관념을 배경으로, 파생적이며 이차적인 형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스며있다고 했던가? "이미지는 단지 일정한 관습을 형성하면서 변화할 뿐 맨 처음의 '오리지날' 이미지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기원의 신화에 얽매여 어떤 원초적 이미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원형도 없고 원초적 이미지도 없다. 다만 이미지 제작의 관습적 전통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인도는 이를테면 '抽象化된 風景'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라보는/보이는 어떤 것들의 무절제한 총합으로 결과된, 잘게 조각난 이미지들의 조립 과정에서 어렴풋이 떠오른, 실제의 존재하는 형식/내용보다는 훨씬 더 '고상하게' 엇나간, 그런 풍경 말이다. 그러니까 풍경은, 자칫 잘못하면 내 삶의 온전한 의식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타르 사막의 밤과 비 오는 바라나시의 새벽"으로 연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삶 속으로 결코 한 발자국도 다가설 수 없었다."고 밝히는 화가들의 한탄은 당연하면서 또 유효하다고 느껴진다.
이 말은, 그러한 풍경들의 연속/배열이 불만족스럽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 만큼 인도에 관련한 우리들 憧憬의 풍경이 애매한 허공에 떠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을 뿐이다. 나는 이제껏 인도에 대한 이미지에 취해 가려진 원형을 궁금해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원형의 실상을-날것으로의 현재를 눈에 가득 담고도 또 다른 관념의 이미지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혹여 이 다섯 화가가 담아 온 일상의 소묘들은, (현재성의 여실한 생생함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잘게 뜯어진 노트의 철자국 마냥 있는 그대로의 생활의 존재일 뿐 그 어떤 종류의 '마치 인도 같은' 이미지는 애당초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반대로 말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3. 화랑 gallery
한 눈에 보인, 화랑에 들어선 첫 느낌은 매우 적절한 그림들이 적절한 공간에 놓여졌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림들은 무슨 묵직한 예술의 담론을 말하기 위해 '체'하지도 않았으며, 서로가 서로를 당기거나 밀거나 하는 '관계'같은 것들이 발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짐작컨대 '그 따위 것'들을 발생시키려는 의도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라고 믿어 본다. 그 덕분에-그것뿐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들이 섞여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화랑'은 이제야 화랑다운 모습을 갖추었다고 느꼈다. 아니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일반의 화랑이 가진/가져야 하는 고유의 기능 중의 한 측면을 이번 기회에 좀 더 잘 드러내게 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스크랩북을 펼쳐든 듯한 인상의 공간-화랑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사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술잔을 집어든 것이었다. 화가들의 예술 생산과 대중의 문화 소비 같은 것들을 무슨 시간의 단위나 부피로 재어 측량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다섯 화가의 112개-씩이나 되는, 여행 기록을 배경으로 간단치 않은 그림이야기들을 나누며 보낸 그 날 그 밤의 여행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저 무심하게 건너가는 풍경화로서만 그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위한 반환의 약속으로, 한 곳에 매달린 고정의 안식이 아닌 자유롭게 흐르는 떠남의 장치로 남을 것이다. 그 곳이 설령 '인도'가 아니라 해도 무슨 상관이야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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