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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040606.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 과연 가능한가?

by PrintStudio86 2017. 7. 10.

20040606.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 과연 가능한가? 

[참여정부 지역문화정책 평가 대토론회-지역문화정책과 문화중심도시] 

[4분과]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의 가능성과 역할 및 전망

유대수/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시기획자



왜 문화인가?


국가균형발전, 지역의-분권과 혁신이라는 전사회적 의제가 ‘문화’를 등에 업고 질주한다. 가히 꿈에 그리던 ‘문화의 세기’가 목전에 이르렀다고 할만하다. 아직은 눈에 띄는 가시적 성과를 보이고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근대적 자본주의 개발전략 속에서 언제 한번 질 높은 문화적 삶의 향유에 눈 돌려 볼 틈 없던 지난날을 회고한다면 이는 분명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각 지자체로부터 쏟아지는 상당한(!) 규모의 예산 책정과 문화혁신 정책들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만큼이나 내심 한편으로는 우려와 조바심을 지니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그간의 많은 정부 정책과 지자체 전략, 사업들이 그 과정과 결과에서 타성에 젖은 과시적이고 물리적인 규모의 미학에 매몰되어, 실재하는 현실의 삶과 일상의 영위로부터 출발하는 자생/자발적이며 동시에 내적內積하는 과정으로서의 체계에 근거하는 방식과는 동떨어진 자세와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확장된 공공 영역에서의 단계별 실천을 예비하는 패러다임의 구성 절차로 작동한다고 보이지 않으며, 다만 우리의 사고-생활방식 또는 도시의 어느 공간들을 막연하게 분절分節시키는 환영幻影의 이미지만으로 우리 시야를 가득 메우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온전한 민주적 문화사회를 위한 ‘실행파일의 형성’이라는 심사숙고의 취지로 다시금 ‘왜 문화인가?’라는 (원론의 반복이 아닌) 자문自問과 자성自省의 과정을 삭제하고 갈 수는 없다. 최소한 지금 우리에게 내재된 또는 필요한 문화적 조건들의 세밀한 점검과, 바로 이 자리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문화/문화사회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라는 도착점에 대한 공공의 합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가능성 그리고 과정들


이미 많은 논자들이 검토하고 제기해 온 바, 전주가 여타의 어느 도시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풍부한 문화역량과 자산을 갖추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전통 한옥군을 중심으로 유ㆍ무형의 활용 가능한 컨텐츠가 즐비하다. 이를테면, 전주는 전통문화중심도시로의 이미지컨설팅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더불어 그러한 유ㆍ무형 자산의 적극적인 리폼re-form과 마켓팅marketing(시공간을 포함하는)을 통한 산업화/경제력의 확보 또한 기대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제는, 즐비한 콘텐츠들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다. 실행 프로그램의 구축과 배치와 집행의 규모/속도/흐름을 어떻게 안배할 것인가 이며 누가 그 일의 주체가 될 것인가이다. 앞의 발언이 총론적 의미에서 도시 공동체의 이상적 목표에 동의하는 것이라면, 각론의 전술에 있어서는 좀 더 치밀한 숨고르기와 안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전주시에 의하면 ‘2011년까지 30개 사업에 약 6천억 원을 투자,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 세계화 시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전통문화를 주축으로 하는 것이 주효할 것이라 보고 있으며 기존의 한옥마을을 기반으로 이와 유사한 문화시설들을 연결하여 ’문화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획은 계획 자체로 완성형*일 뿐 아니라 이미 절반의 시도를 함축하고 있어 우리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바라건대 이 계획은 정상적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여전히 생산과 구축의 과정에 대한 불안의 혐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문제는 즐비한 컨텐츠웨어를 나/지역의 입장에 적합하게 혼합하고 배열하는 일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나아가 제대로 된 의미의 ‘클러스터’로의 정상적인 작동여부 역시 그리 쉽게 장담할만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화산업/관광’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종종 모든 관심과 질문은 ‘과연 돈이 되는가?’로 귀결되곤 한다. 그리하여 문화정책의 추진을 위한 단기적(‘문화’라는 단어가 포섭하는 경계의 개념을 떠올린다면 10여 년 어림의 숫자는 결코 장기적인 것이 아니다!) 체계의 수립은 ‘우리는 (남들보다) 얼마나 더 돈을 쓸(받을) 수 있는가?’라는 자본적 이성**의 추종에 가까워지곤 한다.

우리는 지금껏 이 지역 내에 무수한 기초예술 생산과 고유한 문화적 토양의 텃밭이 엄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지자체 정책들이 대개의 경우 일정한 초점 없이 급박한 성과 위주의 분산된 하드웨어 구축에만 전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속살을 어떻게 채우고 다질 것인가에 대한 선결의 고민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관례적인 물리력의 집행은 고스란히 바로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다녀가는 사람들’과 ‘사는/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도시 정체성의 획득 또는 클러스터의 구축이라는 목표는 활용가치들의 집약과 호환을 전제로 한 지역공동체 일반의 공유와 연동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공유와 연동을 통한 문화적 리얼리티-표상의 넓이와 깊이는, 나의 현재성과는 별개로 웅장하게 번질거리는 기와집(매우 전통적인!)이나 대리석 마감재 같은 것들에게서 형성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층위의 설득력 있는 고민과 제안들을 제쳐두고, 행정절차와 예산집행의 관행이라는 ‘전통’에 기대어 일사불란한 과업의 완수를 외치는 자리에서 현상할리도 만무하다.


그런 뜻에서 타 도시와의 상대적 차별성을 염두에 둔 듯한 ‘전통’이라는 단어가, 현재적 삶을 밀어내고 대상화시키는 일방적이고 통념화한 과거지향의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책 내부의 각 단위 사업간 운용 개념의 차이는 가능한 좁혀져야만 하며, 그것들은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며 넘나들어야 한다. 동시에 산재한 예술문화 생산물/생산자들의 적극적인 연계와 소통의 활로를 선차적으로 마련해야만 한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산재한 풍경들, 하나의 예


이러한 것들은, 예를 들자면 한옥마을의 느긋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교통정책과 관련한다. 또는 막연하게 ‘전통적인 것’이라고 우기는, 거리의 변압기와 신호제어기 위에 덧씌워진 플라스틱 기와지붕과의 불편한 대면과 관련이 있다. 또는 고사동 문화의 거리 조성과 차이나타운 조성 사업 사이의 연관/호환성은 무엇이며, 자전거도로의 아스콘과 걷고 싶은 거리의 화강석 조각들은 무슨 상관이 있는지, 185억 규모의 영상미디어파크 조성과 전통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겠다는 발상과는 어떤 교감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에 관련이 있다.


어쩌면 현재 전주시의 주요 사업 계획으로 거론되는 전라감영 및 4대문의 복원과 한방문화센터의 건립과 공방촌의 조성과 문화컨벤션과 체험학습관 건립 등등의 화두와 깊숙한 관련이 있다. 무려 6천억 여원을 쓰겠다고 호언하는 이들 사업의 명명 속에서 아무래도 ‘傳統’이라는 단어 외에는 그리 치밀한 조합의 결을 찾아보기 힘들다. ‘건립’과 ‘조성’ 식의 개발논리를 축으로 하는 물화된-자본화된 대량공급의 혐의 이외에 어떤 ‘文化的 耐久性’에 대한 배려의 흔적도 발견하기 힘들다.


전통은, 단순히 과거의 어떤 모습을 한 자리에 고정시키고 관조觀照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삶의 연속선에서 끊임없이 살아 숨쉬고, 지속하고 변화하며 재발견되고 재창조된다. 현재의 풍경에 맞게 재구성/재맥락화되지 못하는 전통은 골동品이거나 문화財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이미 ‘문화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선가 교동 한옥마을을 ‘미니어처’라 비꼬아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한옥마을이 설사 그 외형과 관리(규율의 측면에서)와 산업(=상업)화의 지점에서 나름의 성과를 가졌다 한들, 우리가 어느 순간 그 공간을 주목하고 사용하고 즐기고자 했던, 그리하여 나의 문화, 우리의 정서로 체득하여 축적하고자 했던 본래의 공감각共感覺적 속성을 일정하게 탈색시켜 버렸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남은 것은 거대하지만 건조한 장소 이데올로기와 (세트장을 공개하여 얻어낸) 냉정한 개발이익의 성공신화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구도심 활성화 방안과 연동하는 도청사 부지의 전라감영 복원 계획에 있어 선뜻 동의하기 힘든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현재까지의 발언과 제안들을 종합해 보면, 그 자리에는 또 하나의 경기전(보다 약간 더 큰 규모일)이 들어설 공산이 크다.*** 그것은, 풍남문과 객사를 연결하는 구도심 가시권 내 거리의 조망(중부경찰서 건물이 사라진다는 전제 하에)이라는 측면에서, 또는 유수의 고건축(그런데 정말 古건축인가!)과 숲이 어우러지는 도심 공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역시 생활과 역사의 현장을 깨끗이 밀어내고-텅빈 공백을 가정한 상태에서, 새로운 건설사업을 부양하는 밀어붙이기식 개발 전략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들다.**** 잘 생각해 보면, 현재의 도청사(구 경찰청사를 포함한) 역시 오래된 역사요, 우리의 전통이요, 살아있는 근대 문화유산임이 틀림없다. 이 명백한 ‘문화적 컨텐츠’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맞닥트린 지금, 결과적인 표피의 형태에만 집착할 일이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짐작컨대 전라감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통제되고 관리되는, 박제화된 감상물로 다가올 것이다.***** 무엇인가를 밀어내고 남은 자리에 무엇을 얻기 위해 신규 사업을 벌여야만 하는지 설득력 있는 철학을 제시해야만 한다. 산업화와 경제력의 확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나/지역의 정체성을 어디로부터 어떻게 규정받을 것인가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여타의 건립, 조성 계획의 부분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대안은 없는가? 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 대상화된 정지태의 평면이 아니라 쓰여 지고 순환하여 살아있는 입체적 문화지도를 얻고자 하는 게 목표라면 더욱 그렇다. 도청사의 문화적 활용, 구도심의 활성화라는 명제는 기와집 몇 채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곳을 사용하고 그 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문제다.



다시, 문화로


살아있는 문화지도를 그리는 일은, 먼저 테두리를 그어놓고 가두어 ‘놀아봐라’ 하고 강제하는 일이 아니라 ‘잘 노는’ 것들을 그저 잘 놀게끔 놓아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게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그 테두리를 유연하게 확장시켜 내는 일인 것이다. 출발은 그 곳에 있다. 그 다음, 전주라는 도시공동체의 정체성을 굳이 획일하게 묶어내는 일만이 문화클러스터 구축의 전체는 아닐 것이며, 전통이라는 화두가 백 년 전의 어느 한 지점에 우리 시선을 못 박아야 하는 일만도 아님이 분명하다. 전통은 이미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통문화’를 다스리고자 하는 일에 앞서 ‘문화전통’을 쌓아내는 일이라는 점을 공유해야만 한다.


기실 전주라는 도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깊이 고려해야만 한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작다고 해서 웅크리자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일부러 걸치려고 애쓸 필요는 더 더욱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재된 문화체계의 외화와 정당한 활용을 고심하는 마당에서야 ‘남’들과의 비교라든가 규모의 미학에 이끌리는 따위의 경박함을 먼저 내비칠 필요는 없다. 전주는 가장 전주다운 정체성으로 ‘가장 전주적인 도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언컨대, 그것이 ‘전주의 세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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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과 끝을 포함한 모든 동선動線을 교리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 강내희 교수의 글, <겅제적 이성 비판과 사회발전:문화적 권리, 공공성,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하여> 중에서 ‘경제적 이성’에 비유함.(참여정부 문화정책의 개혁과제 및 대안정책 제시를 위한 공개토론회, 문화연대ㆍ한겨레신문사 주최, 2003. 7. 2)

*** 불행하게도 필자는 교동 한옥마을의 초기 개발 단계에서 보았던 용역보고서의 표지그림이 그대로 교동거리에 재현되는 것을 목격했다(누가 그것을 우리의 본래적 전통이라고 장담할 것인가!). 다시 한번, 구도심 활성화 방안을 강구한 용역보고서의 표지그림이 어김없이 현실로 드러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 이 점은 대규모의 형식을 갖춘 프로젝트 개발을 통해 ‘국비’를 ‘따내야’ 한다는 강박증의 혐의와도 통한다.

*****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이 연상된다. ‘잔디보호’라는 ‘체제’적 훈육에 익숙한 우리는 그 공간으로부터 이미 심리적으로 위압당하고 배제 당한다. 당연히 관리자-감시자의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그 공간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만 보아야 하는데, 그 놀라운 녹색의 평면성은,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닫혀있으므로 결국 ‘광장’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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