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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19990804. 곽승호개인전-갇힌 방에서 묻다

by PrintStudio86 2017. 7. 10.

19990804. 곽승호개인전-갇힌 방에서 묻다

보다갤러리/1999. 8. 4 - 8. 10

유대수/화가, 서신갤러리 큐레이터


이런 식의 질문이 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따위의.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무리 끙끙대봐야 결국 별다른 대책 없이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는 그런 질문들 말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기나 한 양 칙칙한 유폐의 그늘을 여드름처럼 달고 다니는 내 가슴의 한 쪽, 밀폐된, 자기만의 방, 순례자의 고독 같은, 뭐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식의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시 말하면 자기 존재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라거나 혹은 참을 수 없는 의식의 무거움을 견디지 못해 어떤 식으로든 짓뭉개버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미술은 위험하다. 더 진지해져야 하니까 위험하고 더 까발려져야 하니까 위험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전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위험스럽다. 그런 위험함을 무릅쓰고서라도 기어이 쓸개 곱창 다 빼내서 바짝 들여다보고 싶다면 어찌어찌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그 동안 오른 취기가 싹 가실 정도의 답을 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직 혼자서만 들여다보는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타자(他者)들에 의해 간섭받고 교란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갇혀 있다. 물리적으로 가시화 시킬 수는 없는, 그러나 상당히 구체적인 모종의 공간에 갇혀 있다. 보기에 따라 그것은 무한대의, 그러나 어떻게 어느 부분을 포획하느냐에 따라 별다른 저항 없이도 충분히 변질될 수 있는 에클렉틱(eclectic)의 항로를 암시하기도 하고, 나? 이렇게 살아 하는 식의 무덤덤한 너스레가 얹혀진 '엄마의 방'같은 알량한 추억으로도 보인다. 어떤 식으로 읽히든 그것은 느낌이나 감각 또는 직관적 감정이입같은 것들을 전제로 삼는, '그림 그리기'라는 아주 오래된 원초적 행위를 빌어 자기 삶의 몇몇 구석을 드러내 보겠다는 말인데 이상한 것은 자기 스스로 구축하고 자기 스스로 유폐당한 그 막막한 공간에서 그는 매우 여유만만하게 늘어진 자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식의 공간설정이 그다지 폐쇄적이지 않다고 믿는 듯 하다.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제 발로 걸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든지 말이다.


한편 어떤 그림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무리할 정도로 과장된 인체나 사물을 통해 근거가 불분명한 억압기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안쓰러운 몸부림이, 떼를 쓰듯이 화면 곳곳에 널려져 있다. 일견 상반된 대척지점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두 개의 축을 양손에 나누어 쥐고, 제도나 담론 따위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억압과 여전히 하나의 객체로 존재해야만 하는 강박의 그물망으로부터 그의 가난한 독백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아주 편안할 것이 분명한 의자에 길게 누워 하릴없이 까닥거리는 커다란 발이나, 무료한 일상의 공허를 달래고도 남을 듯이 한껏 뿜어내는 담배연기 같은 것들이 백수의 그것처럼 나른해 보인다고 해서 칙칙하게 어두워져만 가는 저 방 끝 어디쯤엔가 묻어 있을 존재의 무게에 대한 지겨운 질문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한데 아마 이쯤은 그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갇힌 공간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보이는 반쯤 열린 문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묻는다. 여기에 방이 있고, 그 방안에 화가가 있고, 권태와 자만, 허위와 폭력이 있고, 술과, 농담과, 수음으로 더럽혀진 화장지와, 아! 그 이름도 찬란한 자본이 있고, 또 다른 무엇들이 잔뜩 있고, 여기까지는 대충 알 것도 같은데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이런 구질구질한 방을 까발려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지, 이 방 말고 또 다른 방은 없는지, 저 문을 나서면, 그 다음엔 무엇이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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