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401. [서평]일상속의 미술-이발소그림
문화저널 서평, <이발소 그림 - 일상 속의 미술; 민화에서 복제화까지, 박석우, 동연, 1999.03>
유대수/화가, 서신갤러리 큐레이터
"요즘은 미술관이 미술의 주인인 것처럼 보인다. 미술은 몇몇 사람만이 감상하는 밀실로 숨었고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선망만이 허깨비처럼 남아 있다."
그렇다. 사실 먹고살기 바쁜 일반의 사람들에게 '미술'은 얼마나 어려운가. 화면 곳곳에 장치된, 암호화한 거대담론이나 사회학적 코드들에 가려 일상의 아름다운 꿈들은 자칫 통속의 신파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미술에 대한, 그림을 향수하고자 하는 대중적 욕구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고급이냐 저급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미 그 곳에는 또 그 곳의 미술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적어도 어느 한쪽의 '미술'의 편을 들 때 그 반대쪽의 '미술'의 위치를 어떻게 가늠하고 재단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말하자면 어떤 이름을 붙여 부르느냐에 관련된 지점에 있는 듯하다. 그 지점으로부터 소위 '이발소그림'은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가 되고 민초들의 자생성에 근거한 대중미술의 제 맥락을 짚어 가는 작업의 전제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이 별로 없던 시절에 '이발소 미술관'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서민들의 문화적 시각으로부터 대중미술의 온전한 되새김질을 시작하고자 하는 이 가벼운 문장의 보고서는 사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우리 주변의 흔한 풍경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것은 그것이 시시해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친숙함의 정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친숙함이 도리어 재치 있거나 가끔은 비일상적인(?) 감성의 발현을 꿈꾸는 대중미술의 한 모퉁이를 가려버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친숙함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곳에서 부닥쳐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상투적 소박함으로 인하여 가정집 안방에서부터 식당과 술집과 학교와 놀이터, 심지어는 목욕탕에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대중들의 손과 발이 닿는 곳에는 항시적으로 거주하는 놀라운 번식력을 자랑한다.
나는 여기에서 생각한다. 대학을 통해 정규 미술교육을 받고 화가입네 하는 폼에 빠져 있는 나 역시 택시를 탔을 때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와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소녀를 만날 때나 중국집에서 물레방아그림을 만날 때 머리 속을 헤집는 많은 생각들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 꼬리를 무는 연상들은 결국 미술의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따지게 하고, 어려운 미술과 쉬운 미술의 경계를 물어보게끔 하며, 제도와 반제도를 점검하게 하고, 고급과 저급의 위치지움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 길항관계들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우리들 삶의 저간을 두루 에워싸고 있는 그 신통한 대중 미술적 향유에 관련한 포식능력에의 경탄이 나의 생각을 연장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잡다한 연상의 말미에 한자리에서 한 권의 책을 통해 웬만한 대중미술품들의 면면을 들춰볼 수 있다는 것은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사실 예술적(?)으로 눈길을 받아본 일이 거의 없는 길거리의 '싸구려미술'에 이처럼 진지한 관심을 표하는 동시에 미술사적 맥락으로의 구획을 짓고 싶어 한다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저 멀리 원시동굴벽화를 필두로 조선시대의 민화와 혁필, 인두그림, 복제화까지 연결짓는 글쓴이의 대중미술-글쓴이는 '생활미술'이라는 표현도 썼다-에 대한 애정은 대단해 보인다. 특히 '이발소그림'의 원조 격으로 민화를 지목하며 말 그대로 대중들이 생산하여 대중들이 소비하는 미술의 대중적 소통체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개화기 이후 서구문물의 유입과정과 일본 미술문화의 영향, 6.25를 거치며 확산되는 미국식-거의 흑인 중심의- 오리엔탈리즘에 그 맥을 잇댄 대중미술의 발달사(?)는 음미해 볼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은 글쓴이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바 진정한 소통력과 생명력으로 시대의 정서를 담아내고 거리에서 담담하게 존재해 온 이발소그림은 또 하나의 시각으로 엮어내는 대중미술사를 가능케 한다고 확신 한다는 식의 제법 묵직한 담론의 가능성까지 열어주기도 한다는데 있다. 하기야 '상화'나 '거리미술' 또는 '키치'라는 용어들을 통해 제도미술-사실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자주 언급하는 '제도권 작가'나 '제도권 미술'이 명확히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쨌든 나 역시 나름의 '제도권 미술'에 대한 구획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말을 쓸 수밖에 없다.-적인 맥락으로 재해석되거나 재창조되는 작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순수'에 편승한 비하적 용어의 사용까지를 포함시키는, 별반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부터 연유한다는 데에 대한 글쓴이의 우려가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킬만한 '제도문화'적 인식의 틀이 과연 가능해질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각설하고, 그것이 제도권이든 아니든 간에 '미술'의 존재 이유가 명백한 만큼이나 우리의 생활 곳곳에 들어박힌 이발소그림의 존재 또한 명백하다.
'이발소그림은 우리의 삶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대중 그림의 통칭처럼 쓰이는 이발소그림은 '미술'의 존재 이유를 가장 정직하게 담고 있다. 원래 미술은 삶의 한 요소로, 생활에서 부여받은 자신의 기능에 의해 존재를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발소그림은 이발소에 걸려 있는 그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세 이후 우리 대중미술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그림들을 일컫는 하나의 상징어이며, 시대를 읽는 하나의 해석 코드다.
바로 그 시대를 읽는 키워드로서의 역할을 나눠 가질 '이발소그림'에의 부담 없는 여행은 우리 시대의 미술문화에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지한 문화론적 탐구이거나 대중미술상식에의 호기심이거나 그저 편안한 눈요기로서의 접근이거나 간에 한번쯤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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