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 & Column

19980901. 소박한, 그리하여 깊은 - 남궁산 판화전을 보고

by PrintStudio86 2017. 7. 10.

19980901. 소박한, 그리하여 깊은 - 남궁산 판화전을 보고


두 정신의 만남전(전주 우진문화공간),1998, 문화저널 리뷰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는, 아직은 지켜내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있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나 한 듯이 힘들어하고 체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해 아름다운 삶에 대한 대화나 인간에 대한 사랑 같은 것들이 귀찮아질 무렵 우리들 마음 한켠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희망이다. 이번 전시 제목이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생명과 희망은 이음동의어다.


생각해 보라. 생명의 온기가 없는 땅은, 희망 없는 삶은 얼마나 피폐한가! 화면 가득 차 오르는 노오란 달 속에 여린 새싹하나 물고 날아오른 새의 가볍게 잠긴 눈을 바라보자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세상에는 이런 삶도 있구나. 요란스럽게 게거품을 물며 지껄이지 않고도, 예리한 첨단의 장치와 유행의 민감함에 쫓기지 않고도 반자연과 반생명과 반인간적인 것들을 질타하고 우리네 삶의 질곡을 다잡아 가라앉히며 가슴 훈훈한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다.


무릇 생명 있는 것들 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을까마는 그중 가슴 벅차기로는 지금 막 움터 오르는 어린 싹들이 아닐까 싶다. 남궁산의 그림에서는 바로 그런 어린 생명들의 재잘거리는, 그러나 전혀 시끄럽지 않은 노래 같은 것이 들린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푸릇한 노래 듣기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까 온갖 변화무쌍함이 판을 치고 새로운 것들과 어려운 것들과 거대한 것들이 최우선의 가치로 대접받는 그런 세상에, 이런 소박함, 작은 것들, 결코 어렵지 않은 생명에 대한 단순한 고백이 얼마나 통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와 함께 그래도 아직은 세상에 건질만한 게 남아있나 보구나 새삼스럽게 고개를 내젓는다.


목판이 가지는 특질을 최대한 살려내며 다듬어 간 그의 화면은 아주 단순하다. 그런 단순함에 비하여 지나칠 정도로(?) 밝고 화려한 색상이 우리의 시선을 자극하지만 그런 원색의 과감한 구사가 그다지 거북스럽지는 않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제공하는 이야기의 소담함이 그 만큼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근하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늘상 보아오던 것들, 그러니까 일부러 설명하거나 기억해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이미 우리의 망막과 가슴속에 자연스럽게 각인 되어진 그런 것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는 듯이 한가롭게 서서 우리의 마음을 당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남궁산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대학 졸업 무렵에 얼핏 보았던 장서표전에 대한 기억과 얼마 전 서울에서 가진 내 두 번째 개인전에 일부러 찾아와 요즘 드물게 목판을 만지는 후배를 만났다며 반가워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일에 대한 깊은 고마움 정도일 것이다. 물론 판화를, 그것도 목판화를 주로 만져온 나에게 오윤이나 이철수 등의 이름과 작품이 이미 기억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이름 또한 당연히 내 기억 속에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 그렇다. 판화를 얘기할라치면 우리는 버릇처럼 오윤을 앞세우곤 한다. 아마도 그 소박하고 힘찬 검정 선들이 판화의 전부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오윤의 그림은 한국의 목판화를 점령했고 오윤이 없었으면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이철수는 단언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락에 남궁산의 목판화가 있다. 그렇게 선을 대고 보면 그의 이력은 간명해진다. 80년대의 미술운동 속에서 자라 장서표를 거치며 그 자신의 또 다른 세계를 마련하기까지, 고집스럽게 때로는 쓸쓸하게 세속의 현란함과 발빠른 눈치에 아랑곳없이 목판을 새겨온 것이다. 그 고집스러움만으로도 나는 그를 좋아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