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628. 지역미술운동의 정체성 확보-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유대수/판화가
전북민족미술인협의회 6월 정기모임 주제발표
[지역미술운동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회원정기전 평가를 겸한 제1차 토론회]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지금 '미술운동'이라는 말이 가지는 함의는 여러 가지로 읽히고 있다. 무작정 진보를 뜻하는가 하면 민족미술, 민중미술, 또는 그런 정서의 체현의 의미 아니면 '아직도'를 대화의 시작으로 삼는, 지난 15년여의 정치적 현장미술 활동의 여운 내지는 미련(?)이라는 식으로도 통한다. 또는 아주 막연하게 새로운, Avant-Garde식으로 이해하는 수도 있겠다. 더욱이 바로 그 미술운동이라는 용어를 아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특정한 지점에 불특정하게 고착화시켜버린, 일종의 출발점이자 진행기, 성숙기라고도 할 수 있는 80년대-이 말은 이제 너무 지루하다-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미술운동의 의미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으며, 말 그대로 추상화되어 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술운동을 어떤 방법을 통해 실현할 것인가의 기술적 논쟁보다는 미술운동이 가지는 미학적, 실천적 함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라는 점이 될 것이다. 특히나 지역적 특수성이라는 논리에 소급당하여-지난 시기 전국적으로, 대규모적으로 정치적 이슈파이팅에 휩쓸리던 운동적 실천의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남아있는 의욕의 분출을 '새로운 운동방식'과 그 방식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동지들(?)을 찾는 일에만 소진해 버린 결과로-아무런 원칙적 합의도 없이 미술운동이라는 낱말을 남발해버리고, 아마도 전혀 운동적이지 못한 부실한 '조직'의 껍데기만을 떠안게 된 어쩔 수 없는 의무와 책임을 위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의 '미술운동'에 대한 핵심적 이해와 요구는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인가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미 가져버린 '구식의 미술'과 '신식의 미술'에 대한 강박관념들-아주 고집 센 할아버지의 응석과도 같은, 속이 빤히 보이는 얼치기 예술관들 말이다-이 바로 작가이고 싶어하는 자신 스스로의 가슴에서 제거되지 않는 한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는 '미술운동'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는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무엇을 위하여인가는 이제 집단의 책임은 아닌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만큼 미술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어 있다. 무엇에 대한 선차적 각성이 없다면 도대체 뭐하려고 집단을 찾는단 말인가! 즉, 우리가 정말 '미술운동'을 하고 싶다면, 그리하여 짜증나는 현실의 안일함에 견디지 못하는 비종속의 일탈자가 되고 싶다면, 우리 주변에 수없이 널린 충분히 활용 가능한 미술적 실천방식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그 실천방식의 전술적 요구를 챙기는 일이 급선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현재 자신의 건강(?)을 체크해야만 하는 절차가 뒤따른다. 온 몸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자기를 잘 아는 것 만큼 제대로 된 대안이 또 있을까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지금의 전북민미협은-까놓고 얘기하자- 전혀 '미술운동'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로부터 기인하는데 어쩌면, 마치 처음부터 '미술운동'의 원칙적 함의하고는 별로 친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몇 회원 구성에서 특별히 드러나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오해하지는 말자,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조직'이다. 전일적 지도체제를 요구받는 상황이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상명하복식의 당(?)의 명령에 익숙한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미술적 '무엇'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어떻게'의 선두에서 이미 자신 스스로가 푯대가 되고 자기 단위의 중심이 되어야만 했다. 아무도 자신 스스로가 '조직'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다.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작가성은 존재하되, 상호공존적 작가성-좋은 의미의 집단적 작가성일 수도 있겠다-은 별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이라는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공유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대부분 구성인자들이 적어도 자기 생활의 스케일 내부에서는 이미 많은 것을 갖추었다고 믿고 있으며 또 노력에 노력을 더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바로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허무해질 때, 그 허무함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자기 탓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그로 인한 대내외적 손실은 아주 많다. '미술운동'이라는 것이 자체적으로 요구하는 폭발적 응집력이 생길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미술운동'에 대한 관념적 시각차가 점점 벌어짐으로 하여 미술실천의 행위에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적인, 다분히 인간적인 감정들도 쌓여가는 게 사실 아닌가!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장담하건대, 이 조직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니면 그저 그런 2류 미술동호인 그룹이 되거나일 뿐이다.
하나 더 까발리자면, 왕년에는 그래도 '미술운동'을 한다는 자부심(?)에 웬만한 실수쯤은 감싸 안고 용납해 주는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사상성(?)이요 '민중'을 사랑하는 희생적 열정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묻고 싶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지금의 문화지형도 안에서라면, 아무리 그것이 당대 사회변혁에 부응하는 참여적 미술운동으로서의 '내용'적 가치를 지녔다손 치더라도 미술품 자체의 '못생김'은 아무도 선뜻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우리끼리만 속닥거리는 차원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을 것임이 뻔하다. 적어도 '미술운동'을 위하여 먼저 준비될 것은 '미술'이다. 한번만 되짚어 생각해 보자. 장작이 부실한데 제대로 불을 지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다시금 반성하게 되는 지점은 바로 '미술적'이라는 형식미학에 관하여 라든지 도대체 '미술작품의 잘생김'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식들의 공박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견제하고 다듬어 본 적이 있어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이전에 우리가 시도했던 몇몇 것들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생긴다. 동시대의 운동적 시도들은 바로 그 시대의 정황적 조건들로부터 감각의 단초를 일으켜 세운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면, 바로 그 동시대의 문화적 감성을 체감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무책임한 작품(?)의 남발은 - 작가 개인의 생산물이건, 집단의 기획물이건 간에 - 사기에 가깝다. 아마도 최근의 관심사가 그렇듯 미술이 미술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 미술이 사회와(또는 인간과) 어떤 식으로 교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혹은 공동의 이데올로기적 집단화가 퇴락하고 독립적 존재로서 각 개인의 '차이속의 연대'가 필요로 해진다는 맥락에서만 보더라도 우리의 조직관은 변해야만 한다.
'조직'은 필요하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조직은 전체의 '어떻게'를 위하여 존재하지, 개개인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로만 본다면 조직은 이제 그저 그런 전시의 품팔이나 회원관리, 모임날짜를 정하는 식의 것들 이상의 그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알량한 의식(?)만 통하면 그저 다 동지라는 식의 발상은 이제 접어두자. 이곳은 '미술'이라는 무기를 통하여 '운동의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날선 칼의 무대이지, 인정많은 사람들이 모여 미술 비슷한 것을 들고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데가 아니다.
조직의 외양을 가꾸는데에 너무 혈안이 된 나머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검증절차를 아직 가져보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를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수많은 '어떻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야말로 '조직적' 미술실천을 하고 싶다면, 빠른 시일 안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정리해고'해야만 한다.
미술적 사고에 국한시켜 표현하자면, 자신이 바라는 '미술'이나 '미술행위'이거나 간에 자신의 주체적 독립성을 세우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의 삶은 물론 어느 집단에서조차 해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조직'으로부터 새로운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길을 원한다면 자기가 걸어가라! 거기가 곳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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