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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19980401-'불온'한 나라의 '불온'한 상상력-신학철의 모내기사건을 보며

by PrintStudio86 2017. 7. 5.

'불온'한 나라의 '불온'한 상상력-신학철의 모내기사건을 보며

19980401. 문화저널 시평


아무래도 이 땅은 살만한 곳이 못되나 보다. 글머리부터 이런 자조적인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IMF 신탁통치만큼이나 국제적으로 망신스러운 일이 또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8일자 일간지 보도-신학철의 작품 모내기 관련 대법원 판결;검찰의 상고이유 받아들여 유죄 인정, 원심판결(무죄) 파기, 사건을 서울지법 합의부로 환송.


문제는 '불온'함이다. '반외세 자주통일에 대한 염원과 민족공동체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희구'를 표현한 그의 그림을 놓고 하는 말이다. 무엇이 어떻게 '불온'하다는 말인가? 복사꽃 핀 고향 동네를 그려 놓으니 거기는 김일성 생가란다. '빨간 눈'에는 '빨간 것'들만 보이나 보다. 큰일 났다. 이제 우리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며 노래만 해도 고무 찬양죄로 '빨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더욱 할 말을 잃게 하는 것은 상단부는 북이고 하단부는 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발상이다. 하긴 거창하게 도상학이나 미술비평이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셋말로 '미술'의 '미'자도 이해 못하는 자들의 짓거리가 그렇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모내기 풍자전에서 한 작가는 바로 그 하단부와 상단부의 위치를 뒤바꾸어 제작한 그림을 걸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일게다. 왜 북한이라고 미루어 짐작-그들은 무척 특이한 상상력을 지녔다. 또 그들끼리의 그런 상상력이 없으면 국가안보가 위태롭다고 믿는다.-되는 위쪽만 평화롭고 풍요하게 그렸냐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북한을 찬양했다고? 위쪽은 다 북쪽인가? 무지막지한 레드 콤플렉스다.


그들은 '미술'을 그렇게 밖에 읽지 못한다. 작품 자체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 외에 그들은 또 그 작품이 놓인 맥락이나 배경(콘텍스트)도 중요하다며 문제 삼고 있다. 아니 문제 삼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맥락 자체를 표현물의 이적성 판단 여부의 핵심 잣대로 삼은 듯하다. 작가 신학철이 속한 민미협과 민예총 같은, 진보적 문화운동단체의 정황적 활동에 대한 확고한(?) 심증과 지난 10여 년간의 통일운동, 80,90년대를 거치는 시대적 상황 등을 고려해 볼 때 당연히 그렇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쉽게 말하면, 민미협과 민예총은 '빨갱이 단체'니까 여기 속한 사람들은 다 '빨갱이'이며 그래서 '빨갱이'가 그린 그림은 당연히 '빨간' 냄새가 난다는 식의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법원에서. 그들의 공안적 상상력은 화가의 '불온'한 상상력 이상으로 대단해서 위험하기까지 한 수준이다. 미필적 고의? 이 정도면 그들의 수구반동적 음모를 눈치 채고도 남는다. 이 나라 대법관들의 양식 수준이 꼭 이 만큼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 사건은 '김대중 정권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읽힌다. 판결 날짜가 정확하게 김대중 정권의 '사면 복권일'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최근에 표출된 '북풍' 공작의도-안보위기를 부추겨 기득권을 유지하려는-와 '맥락'이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김대중 정권이 이 판결에 관여하지 못할 거라는 대법관들의 오기와 배짱도 엿보인다.


80년대에 이미 김수영이 말했단다.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하다고,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제껏 '불온'했고 앞으로도 '불온'할 것이다. 도대체 이 어쩔 수 없는 '불온'함과 좁아진 입지를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수구기득권 세력과의 '불온'한 대결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통일의 열망을 노래하는 한 미술가의 꿈을 잘나빠진 대법관 나리 몇몇이 '불온'하다고 난도질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들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를 만들거나, 즐기거나, 지켜가려고 애를 쓴다면, 아니 예술이 가지는 풍부한 상상력이 우리의 꿈과, 희망과 결합하여 무언가를 염원하고 희구하기만 한다고 해도 그 순간 우리는 모두 '불온'해지고 말 것이다. 걔네들 때문에! 행여 알고나 있는가, 우리는 소위 예술 한답시고 마음껏 꿈꾸고, 노래하고, 그림 그려댔다가는-물론 일부 수구세력의 입맛에 맞지 않았을 경우에 말이다-모조리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행위에 해당하는 '불온'한 작가가 되어버리고 마는 가난한 나라에 산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월간『말』 98년 5월호에 실린 이재현씨의 글의 의도에 적극 공감하며 그 글귀를 조금 길게 인용하며 마칠까 한다. 혹시라도 『말』지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마당에, 도리어 민주화운동 및 통일운동에 헌신해온 양심적 예술인과 그 단체를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더 나아가 지난 시기의 시대 상황의 역사적 의의를 반동적, 자의적으로 훼손하는 대법관들은 역사 앞에서 탄핵받아야 마땅하다. 국가보안법 투로 말하자면, 이번 대법원 판결은, 국론분열과 사회혼란을 초래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동수구 세력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동한' 것이며 이는 설령 '미필적 고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사법제도의 '구조조정'과 법관의 '정리해고'를 위해서, 혹은 훗날의 역사가들을 위해서 이번 상고심에서 '전원일치'로 시대착오적 판결을 내린 대법관의 이름을 적어둔다: 대법관 송진훈, 대법관 천경송, 대법관 지창권, 대법관 신성택. 아아, 그러고 보니 지난 선거에서 아들의 병역기피 문제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던 이도 전직 대법관이었구나."


신학철 모내기작품 관련 사건 경과

1987. 8 민미협 주최 제1회 통일전에 출품, 전시(그림마당 민)

1989. 8. 17 국가보안법 적용 인신구속 및 작품 압수(시경 대공과)

1989. 9 민미협 89년도 달력(모내기 수록, 88년 제작) 압수(시경 대공과)

1989. 11. 15 보석으로 석방

1992. 11. 12 1심 무죄 선고(서울지법 단독)

1994. 11. 16 2심 무죄 선고(서울지법 합의부)

1998. 3. 13 원심파기, 서울지법 합의부로 환송(대법원)

1998. 3. 30 미술연합, 민예총 공동명의로 항의성명서 발표(기자간담회)


유대수作. 모내기 단상. 디지털프린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