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풍경의 내면, 내면의 풍경
유대수/전북민족미술협의회 편집실장
수록>전국민족미술인연합 발행 <미술연합통신, 1997. 6~7월 통합본>
지용출 판화 개인전-풍경의 내면/1997. 4. 30~5. 6 나무화랑, 서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딱딱한 얘기 집어치우고 딱 잘라 말하자면 그것은 희망이다. 사람은 희망으로 산다. 열심히 땀 흘리는 노동과 그 노동의 정당한 댓가와 보람과, 앞으로는 무언가 잘 될 거라는 기대와, 또 다른 어떤 것들-.
무언가를 꿈꾼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항상 반복되어질 존재확인의 방식도 바로 이 희망 안에 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희망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기가 퍽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용출이 형의 삶에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 사실 3년여를 같이 지내오면서도 서로 속 깊은 얘기를 그리 많이 나누지는 못한 형편이라서 형의 내면의 풍경(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내면의 풍경’이다)을 짐작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겠지만 형만의 독특한 냄새(?)를 맡아본 적은 있는 것 같다. 아주 가끔은.
그런 종류의 냄새는 여전히 전시장에서도 나고 있다. 우선은 쓸쓸함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는 얘기다. 형이 그려낸 풍경들이 하나같이 그렇듯, 마치 아주 슬픈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애잔함 같은 것들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섬세하고 자잘한, 그러나 세련되지는 않게 적당히 투박한 필선들이(에칭이나 드라이포인트라는 기법들이 자체로 그런 맛이 있다) 촘촘히 얽혀 자아낸 형상들이 그저 혼자 있다. 질퍽하게 펼쳐진 갯벌도,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생선 쪼가리들도 그저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인다.(내가 전시장에 갔을 때, 사실 형은 혼자 있었다. 작품 설치를 도와주겠노라고 말만 앞세워 놓고도 대충 작품배치를 해놓아 버린 연후에야 부시시 얼굴을 디밀었었다. 평소에도 혼자서는 벅찬 일거리가 생겨도 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다.) 곧 무너질 듯 버티고 서있는 정미소 역시 혼자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잡다하고 수선스러운 것들 보다는 더 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들고 더 진지하고 더 아프게 우리에게 무언가를 얘기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형은 진지하다. 적어도 작업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더욱 그렇다. 어떤 때는 미련스러워 보일 때도 있으니까. 그런 진지함은 그러니까 쫓기다 못해 막판까지 내몰려 이제는 더 물러설 곳도 없는 절박함, 하소연하기도 입이 아플 지경인 고통,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외로움, 그 아픈 상처를 그저 묵묵히 품어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아주 낯익은 서해의 풍경들-. 땅의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 그런 것들이 적절히 반죽되어져 있으면서 충분히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의식처럼 별로 번거롭게 떠벌리고 싶어 하지 않은, 고요한 그런 것이 아닐까?
전주와 부안을 오가며 사는 동안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별로 잘 풀린다고는 볼 수 없는 생활여건이 그랬고, 쉽게 발붙이기 힘들었던 지역 미술판에의 적응이 그랬다.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었을 테고 자신 스스로 그리 외향적이지 않은 성격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꼭 그 만큼씩, 자신과 또 주변 삶에의 고민의 양만큼씩 형의 그림에는 절실함이 있다. 일상적인 ‘풍경의 내면’으로 숨어들어서 은근하게 그 접착력을 더해오는 절실함, 그것이 내 눈에는 모종의 희망으로 보인다. 앞서 얘기한 애잔한 감상의 흐느적거림을 다잡아 내심 모종의 굳은 결심이라도 한 양, 애착어린 시선으로 바다를 보고 들판을 보고 삶을 본다. 그러고 보면 형이 말하는 ‘풍경의 내면’은 곧 자신의 내면이라는 말로 들린다. 자연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그로 인해 이 한판 세상의 내면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래도 아직은 건질게 남아있고, 그래서 삶의 아름다운 가치를 위해 한번 싸워볼 만 하다는 것일게다. 사람은 그것으로 산다. 자신의 삶의 한 가운데로 희망의 물꼬를 터주었을 때 사람은 신명나게 산다. 형의 희망은 그런 것일까?
그런 희망이 결코 시들지 않고 오롯이 살아나기를 나 역시 비슷한 길을 가는 동료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만, 덧붙이자면 형의 그림에서 그 희망의 목소리는 쓸쓸함에 비하여 아직은 낮아 보인다. <효자동-개발지구>가 그렇고 나무 한 그루를 그려놔도 그렇다. 직접 부딪혀 다가선다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 관조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손수 희망의 나무를 심을 수는 없을 것인지, 조금 더, 머뭇거리지 말고-전시서문에서 잘 지적해 주었듯이-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삶을 마주 대할 수는 없을까? 흰구름 이는 시원한 들판에 씨앗을 가꾸는 아낙네들을 그려준 ‘봄바람’이라는 제목의 석판화처럼 싱그러운 희망도 있는 법이니까.
없는 재주에, 있는 말 없는 말 끌어다가 전시평이랍시고 쓴다는 일이 부끄러워 그저 앞으로는 자주 만나 사람 사는 얘기나 많이 나눕시다는 말로 문을 닫겠다.
지용출作. 봄바람. 70×35cm. 석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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