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627. 작업실사람들에 대한 몇 생각
열네 번째 작업실사람들 / 김충순 작업실
미술가 동네에서 이야기되는 것들 중에서 그 중심에 있는 화두라면 아마 미술이, 또는 미술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필요해지는 여러 가지 실천방식 중의 한가지로서 '작업실사람들'의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부터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원점이다. 가끔은 자기 정체성 찾기에서 모호함이나 관념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이유도 바로 원점을 미처 챙기지 못한 상태에서 전술적 우회라는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작업실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각자 자기 위치를 어느 정도? 갖춘 사람들이 모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이미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고, 그 일을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며, 더 잘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으로의 선택이 '작업실사람들'에의 참여라는 식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여기서 생산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동안 이미 만들어내 보여준 좋은 의미들 이외에도 더 많이, 더 좋은 미술실천의 방식들이 계속적으로 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각자의 책임 있는 이해요구의 집산이 언제나 상향평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테지만 최소한 한 발은 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확하게 한바퀴를 순회한 상황에서(우리는 13번의 월간 작업실 순회전을 치렀고 회원은 꼭 13명이었다.)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소위 '개혁 논의'?는, 분명 그 시기적으로나 명분상으로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체 소속원의 이해 일치와 동의를 얻었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미술실천 방식의 잣대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다는 원칙적인 사실을 배려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사실 아직, 제대로 각자의 잣대의 눈금을 확인해 보지 못한 것이다.
'미술'이라는 분야의 특수성을 핑계삼아 각 개인의 독립적 언술들을 모두 용납해야만 한다면 적어도 '작업실사람들'이라는 단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의미들 중의 한가지 정도는 삭제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무도 일정한 방향으로의 조직화?를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양보와 타협, 일정한 수준의 약속이 필요로 해진다.
'작업실사람들'은 아직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기대해 주는 많은 미술소비자들에게 되돌려 준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이다. '작업실사람들'은 할 수 있고, 사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감상적인 자기만족에 머무르거나 비생산적인 곗방 모임으로 머무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칫 또 하나의 권위적 엘리트 집단(?)으로 전락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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