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30-인문주간 : 「인문학, 세상의 벽을 헐다」 인문콘서트
‘전주정신’의 의미와 표상의 가능성
유대수 / (사)문화연구창 대표
▶ 이경훈(1921~1987) 作, 다가공원에서 바라본 풍경, 1960
1. 전제 조건들
이 발표회는 ‘전주정신, 전주의 도시정체성에 대한 집단 담론’을 형성해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 다양한 제시 담론을 모아 ‘주제어’를 정리하여, ‘발전적 전주정신을 정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1) ‘전주정신’은 성립 가능한가? 2) ‘도시’ 전주의 정신인가, ‘전주인(人)-사람들’의 정신인가? 3) ‘전주’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말하며, 언제 어느 때를 지칭하는가? 4) ‘전주정신’이란 게 있다 해도 한 마디-하나의 개념어로 정의할 수 있는가? 5) 그렇게 종합된 ‘전주정신’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전-표상될 수 있는가? 6) 그런데 ‘전주정신’은 지금, 왜 필요하며 어디에 사용될 수 있는가?
‘전주정신’이란 게 과연 있는가 하는 원초적(!) 의문과 함께 우선 떠오르는 생각-질문들이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별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문제들의 경우 각자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경험과 학습 정도에 따라, 수시로, 각론이 제기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 모두 결코 ‘틀리다’고 할 수 없는 내부 조건들, 해석과 적용의 여지들을 충분히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각 문제에 답하려는 각각의 주장들에 대립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불확실한 경로들의 좌충우돌과 추상화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포커싱(focusing)에 필요한 여러 개념들과 다양한 지적들을 두루 살펴야 함은 당연하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전주정신’이다. 이 부분은 앞서 말한 여러 질문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모두 포함하며, 여기에 더하여 ‘전주’에 결합된 ‘정신’이라는 수식어-표현의 정당성 문제도 포함한다. 과연 ‘전주정신’은 무엇일까? 일견 모호하다. ‘정신’의 근거-발현지로서 ‘전주’가 물리적 현상인지 인식적 태도인지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동학정신’하면 인내천이 떠오르고, ‘민주주의정신’이라면 평등, 다수결원칙 같은 것들이 연상된다. ‘전주정신’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보통 ‘정신(spirit)’은 종교, 사상적 바탕 위에 성립하거나(그 자체이거나) 태도, 자세를 뜻한다. 짐작컨대 여기에서 ‘정신’은 전주를 드러내거나 설명될 수 있게 작용하는, 대표성을 띤 표상기제로 정의된 모종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따라서 필자는 일단 이것을 전주에 대한 ‘누적된 무의식이 지향하는 집합적 태도’라고 요약하겠다.
어쨌든 이 ‘정신’이라는 표현의 문제는 ‘전주정신’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로, ‘정신’이 만들어질 바탕으로서 ‘전주’에 대한 구체성을 요구하게 만든다. 바꿔 말하면, ‘전주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찾으려면 ‘정신’의 문제에 앞서 ‘전주’의 실체를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정신’을 담보하는 ‘전주’라는 지시체는 ‘도시-공간’적 전주인가, ‘전주인(人)’ 곧 전주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 먼저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해석과 판단에 따라 다시 ‘전주’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지시하며, 언제 어느 시점 어떤 모습을 전주라고 할 것인가의 문제와 어떤 사람들이 전주사람들인가 또는 전주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구분된 설명과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요약한 ‘누적된 무의식이 지향하는 집합적 태도’의 성립은 지리, 문화, 종교, 정치, 경제적 삶의 배경과 경험, 전망 등이 동일한(적어도 대체로 비슷한) 지평에 있는 ‘개별(개인, 개체)적 태도’들의 종합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개별적 태도는 곧 ‘상당 기간 동안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의 자기에 대한 경험’1)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으며, 집합적 태도는 개별적 태도(들)의 합산이므로 ‘집단의 정체성’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전주정신’을 찾는 일은 ‘전주’라는 집단(도시든 사람이든)의 정체성을 표상(表象)하고자 하는 것이 된다.
‘전주정신’을 ‘전주 정체성’이라 바꿔 읽어보면, 이제 전주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전주라는 도시-공간의 정체성과 전주인-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람(들)의 정체성’은 ‘공간의 정체성’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공간의 정체성’을 통해 그 곳에 사는(살아온) ‘사람(들)의 정체성’을 유추할 수도 있다. 또한 이 둘의 상보적 결합을 통해 ‘전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전주다움은 무엇인가’ 식으로 대체하여 물어도 그 취지와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전주정신은 전주 정체성에 다름 아니며, 전주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전주다움’이 무엇인지 묻고 답하는 일이 된다.
2. 전주와 전주사람들
그것이 풍경이거나, 생태적 환경이거나, 도시계획이거나, 역사적 사건들이거나, 정치-경제적 조건이거나 간에 전주는 어떤 곳이며 전주라는 공간이 어떻게 조망(perspective)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전주사람들’의 성질(a specific character)과 연동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역으로 전주사람들의 성향과 지향, 삶을 꾸리고 삶에 적응하는 태도를 살피는 작업을 통해 도시-공간의 성격-구조 변화와의 연관성에 대입해볼 수도 있을 터이다. 모두가 ‘전주정체성’의 존재와 표상을 가능하게 할 전제조건들이다. ‘전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전주라고 부르고, 언제 어떤 모습의 전주를 전주라고 인식하는가. ‘전주적인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전라북도 전체를 놓고 보면 전주는 한눈에 보아도 배산임수다. 덕유, 지리가 버티고 있는 동부 산악지대를 등에 두고 드넓은 평야를 지나 서해바다를 바라본다. 섬진강 상류를 남으로 두고, 북으로는 만경강을 경계 삼는다. 관촌-상관-신리를 타고 흘러든 전주천과 구이저수지에서 흘러드는 삼천을 끼고 오목하게 앉아 있되 북동으로는 소양천을 넘지 않는다. 남고산과 완산칠봉과 건지산을 병풍삼아 덕진연못에 발 담근다. 이름 덕분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재해가 적은 도시로 평판이 나있다.
전주는 팔달로를 축으로 싸전다리에서 덕진연못 일대까지를 내륙삼아 성장한다. 물론 바깥으로 팔복동 공업단지가 있고 장동, 반월동, 전미동과 35사단이 있다. 비가시권이었던 동산촌이 합류하고 전주역이 이전하고 육지구가 개발되면서 아중리, 왜망실도 전주가 되었다. 미원탑은 사라지고 팔달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던 철길은 8차선 대로가 된지 오래다. 용머리고개를 넘고 우전을 넘어 효자동, 삼천동, 화산동이 번화한 ‘시내’가 되고, 장승백이를 지나 평화동을 품고 구이 턱밑까지 아파트가 치달린다. 도토리골, 어은골을 뚫고 마전을 넘어 서곡지구, 서부신시가지로 뻗어나가더니 내쳐 혁신도시로 그 덩치를 키운다.
이전의 완산(完山)이 전주(全州)가 된지 천년 세월이다.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였다. 풍패지향(豊沛之鄕),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호남수부 전라감영이 자리했던 곳이다. 두터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호남제일성의 관문인 풍남문이 어엿하고 판소리와 완판본과 선자청의 맥이 여전하다. 한지의 본고장이자 서화예술의 기풍이 면면한 곳이다. 일고수 이명창에 귀명창을 더하는 대사습놀이는 여전하며 국제영화제와 세계소리축제가 열린다. 국제슬로우시티이자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다. 당연히 음식 솜씨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맛의 고장이다. 한옥마을은 전주의 얼굴이 되었고, 비빔밥과 콩나물국밥과 막걸리는 전주의 양식이 되었으며, 남부시장에는 청년몰이 있다. “색시같이 종용하고 고즈넉하던” 곳이자 “웅숭깊은”, “늙은 느티나무 아래 놓여 있는 평상 같은 도시”다.2)
전주사람들은 “은은하고 온유하며 부드러운 사람들, 하지만 한번 일어서면 목숨 바쳐 싸우는 사람들. 느릿느릿 어눌하면서도 찰방지고 아금박스런” 사람들로 추억된다. “전주 사람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부대지 않습니다. 안온하고 튀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난리치지 않습니다.”라고 예찬하기도 하는 한편 “푸른 댓잎으로 남은 ‘혁명아 정여립’”, “추사 김정희와 창암 이삼만”, “전봉준과 강증산”, “영락없는 전주사람 ‘벌교 선비 한창기’”, “이창호는 전주다!”, “‘역사의 지문’ 태조 이성계의 얼굴” 등 인물론으로 정리되기도 한다.3) “전주 사람들은 막걸리 한 주전자로 취하고 콩나물국밥으로 해장을 한다”는 소개도 있다.4)
그러나 70년을 버텨온 구도청사는 조만간 철거될 것이고 도시상권은 돈을 쫓아 신도시로, 다시 혁신도시로 끊임없이 이동할 뿐 전주다운 도시 풍경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 마구잡이 개발과 부자들의 아파트는 전주천의 바람길을 막았다. 덕분에 무덥기로 유명한 대구광역시에 버금가는 폭염도시가 되었다. 완주군과 통합하여 도시규모를 키우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일자리를 찾아 젊은이들은 전주를 떠나고 한옥마을은 시끄러워졌으며 일회용 길거리음식의 냄새로 뒤덮였다. 재개발지구가 44개에 이르도록 구도심 생활권은 낙후하고 시청 뒷골목의 성매매촌은 버젓하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옛 추억이 되었고 관통로 사거리 약속장소였던 민중서관은 교보문고가 들어오면서(2006년) 망했다. 그나마 교보문고조차 문을 닫았다(2012년). 전주의 재정자립도(28.9%, 2014년 기준)는 완주군(29.5%)보다 떨어진다. 전주시청사는 2013년 동아일보와 건축전문잡지 SPACE가 진행한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 설문조사 결과 상위 19위에 뽑혔다. 2006년에 엔제리너스 커피점이, 2007년에 자바시티가, 2008년에서야 최초로 스타벅스가 생겼다.
좋든 싫든 이 모든 것들이 전주다. 전주는 어느 시절의 어떤 모습으로 전주가 되는가. 과연 전주는 무엇으로 말해지고 기억되는가. ‘전주다움’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3. 정체성에 대한 몇 개의 텍스트
정체성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 설명된다. 영어로는 보통 ‘identity’로 표현된다. 도시 정체성(City Identity 또는 The Spirit of Cities), 디지털 정체성(digitall identity), 성정체성(sexual identity), 문화 정체성(cultural identity), 정치적 정체성(political national identity), 지역 정체성(regional identity), 민족 정체성(ethnic identities) 등등 그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지역정체성은 지역사회 역사와 공간특성을 통해 다른 지역과 차별화 될 수 있는 정신유산으로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의 정주의식과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과 연계되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융복합산물이다. 즉, 지역정체성의 두 가지 중요성분은 역사인식으로 표현되는 시간축과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특성과 문화로 표현되는 공간축으로 이루어져 있다.”5)
오가닉미디어랩(organicmedialab.com)을 운영하는 윤지영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의 모든 사회활동은 한마디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라고 규정하고, 정체성을 만드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 “서로 상반된, 그러나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두 가지의 욕구, 바로 ‘동일시(identification)’와 ‘차별화(differentiation)’”를 제시한다. 또한 “이 두 요소는 서로 대립되지만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를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우선 ‘동일시’란, 말 그대로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 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누구를 닮고 싶다거나 어떤 그룹에 소속되고 싶다거나, 누구처럼 되고 싶다. 연예인이 입고 나온 옷이나 가방을 매고 그녀처럼 보이고 싶다. 보수적 성향의 정당이나 지구를 구하는 녹색당에 소속되고 싶다. 스티브잡스처럼 혁신하고 싶고 내 삶의 멘토처럼 살고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페이스북에서 자주 스치고 대화하고 안정감도 얻는다. 이렇게 ‘닮고’ 싶고 특정 네트워크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동일시의 욕구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동일시의 대표급 정도 되겠다.
반대로 차별화란, 특정 집단이나 사람으로부터 구별되고 싶은 욕구를 말한다. 정체성에 필요한 두 번째 재료이다. 유행 지난 옷이 아니라 좀 더 트렌디한 옷을 입고 싶은 욕구, 조중동을 읽는 사람과 차별화되고 싶은 욕구, SNS에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를 만들고 싶은 욕구이다. 단순하게는 유튜브 동영상이나 댓글에서 ‘싫어요’를 누르는 것도 차별화지만 페이스북에서 모두 좋아요를 누를 때 아무 반응 없이 침묵하는 것도 차별화의 방법이다.
처음부터 차별화가 의도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다수 속에 존재하기 위한 ‘포지셔닝’은 누구에게나 고민이다. 차별화는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고 이것은 결국 정체성을 추구하는 본능이며 평생 연습이다.“6)
탁석산은 <한국의 정체성(책세상, 2003)>에서 “정체성과 동일성은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변화 속에서도 남아 지속되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이며, “변화, 지속, 동일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정체성의 과제”라고 역설한다. 즉 정체성은 불변이거나 정지된 상태가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결론에 이르러 정체성의 확인만으로는 충족되거나 실천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는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 논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는 정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적인 것이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허전한 그 무엇이 남아 있다. 가령 자신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했다 해도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7)
블로그 <URBAN BOARD>를 운영하는 joeyboy는 캐나다 출신의 도시학자인 Daniel A. Bell과 이스라엘 도시학자인 Avner de-Shalit의 새로운 책 'The Spirit of Cities: Why the Identity of a City Matters in a Global Age' 소개글을 통해 “아무리 다른 도시를 흉내내려 하고, 변화시키려고 애써도 불가능한 도시의 특성들이 있”으며, “그런 것들이 바로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정취로서, 도시의 특별한 성격, 분위기를 형성케 하는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취는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기도 하는데 새롭게 도시에 더해진 인공환경이나 문화적 행사 등은 점점 도시 고유의 것이 되어가면서 시민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고 이에 따라 도시의 정취는 조금씩 변해가게 됩니다. (중략) 예루살렘은 The city of Religion, 몬트리올은 The city of Language, 싱가포르는 The city of Nation Building, 홍콩은 The city of Materialism, 베이징은 The city of Political power, 옥스포드는 The city of Learning, 파리는 The city of Romance, 뉴욕은 The city of Ambition. 저는 여러 도시의 이야기 중에서 베를린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를린을 (비)관용의 도시라고 이야기 합니다. Berlin: The City of (In)Tolerance.“8)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도시문화 정체성’에 관한 논고에서 우리의 논의에 참조할만한 좀 더 세부적이고 현실적인 지표들을 밝혀주었다. 인용된 내용은 “아산정책연구원 여론계량분석센터는 리서치앤리서치와 함께 지난 5월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51명에게 한국의 도시문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다.
“문화 정체성이 가장 뚜렷한 도시는 서울(24.7%)·안동(11.9%)·전주(10.8%)·제주 (8.5%)·부산 (7.4%) 순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잘 모름(19.3%)’이 많다는 사실이다. 상당수의 시민이 도시문화 정체성을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거나 도시의 문화 정체성이 그만큼 뚜렷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는 안동(17.4%)과 전주(16.0%), 서울(15.4%) 순이었다. 매력적이면서 살고 싶은 도시는 서울·제주·부산 순으로 꼽혔다. 전주와 안동 등 전통문화 도시는 문화와 한국 정체성은 뚜렷하나 제주와 부산 등의 현대 문화 도시보다 도시 매력성과 거주 희망도가 떨어졌다. 전통문화를 어떻게 매력적으로 만들 것인가가 이들 전통 도시의 숙제인 것이다. 제주와 부산은 문화 정체성과 한국 정체성에서 전주와 안동에 뒤졌지만 도시 매력성과 거주 희망도에서 앞섰다. 환경·대중문화·관광 등 비전통문화 요소가 한국의 도시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제주와 부산의 문화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가 않다.“9)
4. ‘중심문화론’과 화이부동(和而不同)
설치작가로 유명한 서도호의 작품 <연결하는 집(Bridging Home)>을 보자.10) 이 장면은 얼핏 서양문화에 포위, 잠식되어 이도 저도 못할 지경에 이른 한국문화, 혼란스러운 한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서도호는 이질적 문화충돌에 따른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작업의 중심 주제로 다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문화’를 표방했으나 ‘먹방’으로 히트행진을 하고 있는 한옥마을의 모습을, 역설적이게도 재생 가능한 ‘지금, 여기’의 삶, 근대의 자취를 짓이기며 환원 불가능한 중세의 ‘역사’를 소환시켜내기에 급급한 전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호남이라는 지역을 하나로 묶으려는 작업, 소위 일종의 이미지 창출 작업은 호남학 연구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남학에 대한 원론적인 관심은 1960년대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논의가 시작된 배경에는 전라도 비하, 전라도 푸대접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발들은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대신 지역 내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자는 움직임이 싹트게 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호남학’과 ‘호남문화론’에 대한 논의였다.”11)
이것은 일종의 ‘혐의’일 뿐이다. 그러나, 광주 전남을 대상으로 ‘의향론(義鄕論)’의 상징적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 조상현은 같은 논문에서 “호남이 의향으로 상징화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호남을 하나의 역사의식으로 묶을 수 있는 사건, 즉 5․18이었다”고 제시하며, 이것은 곧 “호남에 대한 푸대접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호남학과 호남문화론을 시도하고 예향으로 도시 상징을 변화시켰듯이, 아직까지도 역사적으로 미완성 상태에 있는 5․18과 푸대접을 벗어나 이데올로기 덫에 걸려 빨간색으로 칠해져버린 광주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지역민의 시도가 의향을 도시 상징으로 만든 이유일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즉, ‘지역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지역에 내재한 본질적 사안이나 실체에 기반하지 못하고 어떤 정치적 의도와 만날 때 충분히 오도되고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비교문화론적 관점에서 본 전주역사>에서 김창민은 전주역사를 일본 오키나와 류큐왕국과 대질시키면서 “전주 역사를 논의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체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건국, 그리고 견훤으로 대변되는 후백제이다. (중략) 이 두 주제는 중심부에 대한 강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12) “오키나와의 경우, 470여 년 간 독립국가를 유지하였지만 결코 자신들이 중심부였다는 역사인식이 없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주변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면서 이에 비하면 전주의 역사 인식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자 주목할 만하다고 밝힌다.
“전주는 한국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주변부였음에도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에 대한 강조는 ‘자신을 지배계급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전주가 조선 태조의 관향이자 조선의 중심이었음을 강조하면 자신을 조선왕조의 지배계급과 동일시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주변에 머무는 것보다 중심에 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도 전주 역사에서 중심부를 지향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결국 중심부를 강조함으로써 전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상이 높다는 것과 자신들이 지배계급과 동일시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3)
“우리가 지금 ‘한국적인 것’ 혹은 ‘한국화’의 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변방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전하는 탁석산의 말을 덧대면 이러한 소외감 해소나 주변부 탈피 차원의 ‘중심문화론’에 대한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또한 지나친 과거에의 집착, ‘겁나 먼’ 역사중심주의 역시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전주다움 곧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한 집단 내에서 이루어진(지고 있는) “여러 분야의 공통된 특성을 찾는 일(탁석산)”이다. 비유하자면 ‘전주라는 집단은 익산 또는 김제라는 집단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앙과 변방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하는 우리의 삶, 여기가 정체성 발현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옥마을의 정체성 상실 운운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이라고 여긴다. 전주의 한옥은 안동의 한옥과 어떻게 다른지, 한옥마을의 상가는 경주 불국사의 상가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한옥마을은 왜 처음부터 여느 자본공간의 상업적 모델과 차별화된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로 승부하고 성공하려는 과정을 밟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들이나 추상적인 테제들만 챙겨서는 ‘답’은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몸담고 사는 현실의 전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러한 양상들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전주의 정체성, 전주 사람들의 ‘성질머리’를 찾는 일은 한결 가까워질 것이라 믿는다. 이를테면 ‘전주 정체성 탐색을 위한 종합플랜’같은 게 필요할 지도 모른다. 기존의 ‘전주학’ 연구에 덧대 좀 더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발언과 탐색이 시도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주시민들이 이 책을 읽고 ‘살기’에 ‘놀기’를 접맥시키는 자세로 4대문 안쪽만이라도 사람 중심의 교통 체제를 갖추자는 공감대를 형성하면 좋겠다.”14)
김화성의 책 소개를 빌어 ‘전주에서 놀기’와 ‘전주에서 살기’에 대해 의견을 전하고 있는 강준만에 동의한다. ‘전주에서 살면서 놀기’나 ‘전주에서 놀면서 살기’가 불편함 없이 한데 어우러지기를 바란다. 같은 글에 거론된 ‘거시기론’과 함께, 이 역시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시기는 모든 것을 다 품에 안습니다. 바닷물도 안고, 강물도 안고, 또랑물도 안습니다. 진보도 이쁘다 허고, 보수도 이쁘다 허고, 뚱보도 멋있다고 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최고라고 헙니다. 거시기는 죽어도 편을 안 가른당게요. 그냥 모든 게 거시기하고 저시기합니다. 그것은 맴과 맴을 이어 주는 ‘침묵의 소리’입니다.” ‘거시기’의 정신은 전주의 얼이라 할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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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다음백과사전>문화의 정체성[Cultural identity, 文化-正體性]브리태니커
주2) 김화성, 전주에서 놀다: 나,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고즈윈, 2009. 선샤인뉴스-강준만의 책읽기(2009. 9. 11)에서 재인용. http://sunshinenews.co.kr/archives/291
주3) 김화성, 위와 같은 글.
주4) 전주 삼천동 막걸리거리, 대한민국구석구석.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food/w_food_list.jsp?cid=1533642
주5) 소진광, 창조적 도시개발과 지역정체성, 한국지역개발학회 추계종합 학술대회 논문집, 2010.
주6) 윤지영,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나’의 정체성(User Identity in Social Network Service), 2013 http://organicmedialab.com/2013/05/01/user-identity-in-social-network-service/
주7) 탁석산, 한국의 정체성, 책세상, 2003.
주8) joeyboy, 도시의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The Spirit of Cities: Why the Identity of a City Matters in a Global Age', 블로그 <URBAN BOARD>. http://urbanism.egloos.com/5653756
주9) 모종린, 고유문화 살린 창조도시로 … 회색도시는 지금 변신 중, [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한국문화 대탐사 <24> 도시문화 정체성, 2014.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5324
주10) 2010, 리버풀비엔날레 설치 전겅, 아트인컬처>에세이>김백균, <문화충돌과 ‘정체성’의 탐구> 중에서 인용.
주11) 조상현, 호남 상징으로서 義鄕論의 전개와 추이.
주12) 김창민, 비교문화론적 관점에서 본 전주역사, 온다라 인문학 시민문화강좌, 2014
주13) 김창민, 위와 같은 글.
주14) 강준만, 선샤인뉴스-강준만의 책읽기(2009. 9. 11). http://sunshinenews.co.kr/archives/291
주15) 강준만, 위와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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