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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꽃심 포럼] 풍류잡설, ‘우리 식’으로 놀기, 그리고 재현의 가능성. 20211126.

by PrintStudio86 2022. 4. 15.

20211126-풍류잡설, ‘우리 식’으로 놀기, 그리고 재현의 가능성-유대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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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심 포럼] 장소로 본 전주 정신 / 2021.11.26.() 14:00~17:30.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풍류잡설, ‘우리 식으로 놀기, 그리고 재현의 가능성

유대수 / 화가, ()문화연구창 대표

 

1. 풍류잡설

전주-선비처럼 놀고 한량처럼 마시다.” 전주를 안내하는 어느 여행 웹진의 머리말이다. ‘1,000년 역사의 자존심을 간직한 가장 한국적인 고장, 전주를 찾았다. 그리고 풍류를 마셨다.’를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전주 여행 1번지로 한옥마을과 경기전, 학인당을 소개하고 특히 전주 막걸리 문화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다.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라는 명성까지 얻은 전주에는 비빔밥, 콩나물국밥과 함께 막걸리의 명성도 자자하다. 전주막걸리가 맛있는 이유는 물이 좋기 때문이다. 특히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은 예부터 청수정(淸水町)이라 불릴 만큼 좋은 물맛을 자랑했다. 게다가 전주는 김제와 만경 등 비옥한 전북의 쌀 생산지를 옆에 두고 있다.

전주에는 막걸리촌이 여러 곳 있다. 삼천동, 서신동, 경원동, 평화동, 효자동 등 권역별 막걸리촌마다 안주가 다르고 특색이 있지만 공통점은 막걸리 값만 내면 안주는 공짜라는 점이다. 3병이 들어가는 기본 한 주전자를 비우고 다시 한 주전자를 더 시키면 새로운 안주가 펼쳐지고 최대 여섯 번까지 새로운 안주판이 펼쳐진다. 전주 막걸리골목의 원조는 삼천동이다. 가장 많은 막걸리집이 모여 있고 선택의 폭도 넓다. 최근 뜨고 있는 서신동은 기존 막걸리전문점과는 달리 푸짐한 안주로 인기다. 젊은 단골들이 많다. 안도현 시인의 단골집인 홍도주막은 효자동에 있다.”

 

머리말의 운치와 풍류를 마셨다는 일견 단호한 문장에 우선 혹했으나, 결국 동네별 막걸리집의 위치와 안주의 푸짐함을 알리는 맛집 안내에 그치고 만다. 선비는 문인의 식견으로, 한량은 무인의 자유분방으로 유래하는바 기대어 짐작해보면, 그나마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안도현 시인의 단골집을 거론한 게 유일하다. 무엇으로 어떻게 놀고 마시라는 건지, 어찌하면 선비처럼 한량처럼 풍류(風流)를 마실 수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전주는 자타공인 맛과 멋과 소리의 고장이라니, 과연 도착하기만 하면, 풍경만으로도 공기를 마시듯 풍류라는 게 마셔지는 것일까? 선비연 한량연하며 그저 막걸리잔을 비우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풍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일까? 풍류를 마시기 위해 필요한 별도의 접속이나 관계 맺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전주의 아취(雅趣)’를 찾아가기 위한(또는 느끼기 위한) 구조나 작동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매일 밤 모여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연암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가 그 생생한 리포트다.

(중략)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金檍)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김용겸이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들렀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김용겸이 책상 위의 구리 쟁반을 두드리며 시경(詩經)의 한 장을 읊었는데 흥취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 문득 일어나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홍대용과 연암은 함께 달빛을 받으며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에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 그런데 김용겸이 무릎에 거문고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환호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리로 옮겨 흥이 다하도록 놀다가 헤어졌다.“

 

여러 벗들과 술자리 만들어 어울리길 좋아하는 필자에게 위 글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한때 소망이자 따라붙고 싶은 선진 모델에 다름 아니었다. 이름하여 백탑청연(白塔)淸緣)’. 문장과 음률이 넘치고, 그보다 더 취기가 넘쳐도, 홀연히 사라져 귀가했거니 싶은 벗을 찾아 한길 가에 재차 술상을 펼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자연으로 어우러지는 그 호기에 감탄한 탓이다. 이후 풍류라는 말을 듣거나 말할 때면 자연스레 연암과 그 친구들의 거나한 풍취(風趣)를 떠올리게 되었다.

다행히 전주에서 화가로 지내는 삶이 종종 엇비슷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나 필자에게는 그게 그리 만만한 일만은 아니었다. 밤을 마다않는 주량은 물론이요 시서율화에 문사철이 거칠 것 없는 다방면 재야고수들 사이에서, 지식과 농 사이를 오르내리는 팽팽한 줄타기 같은 대화를 견디는 일은 보통의 인내심이나 내공으로는 불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웬만해서는, 시작은 그윽하게 노니는 일을 밑그림 삼아 달리지만 끝내는 오두방정의 요설로 혀가 꼬부라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러니 율조(律調)가 맞는 동료들과 매일 밤, 따로 또 같이, 풍류와 명상을 일삼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담론장을 이어갔다는 그들의 활력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암은 흔히 떠올리듯,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축출당한 불운한 천재가 아니라, 체제의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국가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클리나멘(clinamen)’을 그으며 미끄러져 간 유쾌한 분열자였던 것.”

 

그렇다. 애당초 풍류심을 품고 풍류객이 되고자 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비록 외부자였으나, “체제와 제도가 부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윤리와 능동적인 관계를 구성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다 보니, 결국 풍류심을 이루고 풍류객으로 가름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렇게 연암그룹의 한 시절이 풍류로 물들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는 전주에는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들이 모여드는 새벽강이 있다. 그동안 자리를 세 번 옮겨 올해로 30년째 운영 중인 술집이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새내기 대학생부터 백발의 원로까지 단골의 연령대도 다양하고, 농부, 회사원, 사진작가, 만화가, 시인, 화가 등 손님들의 직업군도 모두 각양각색이다.

(중략) 이제는 경기도로 거처를 옮긴 정양 시인과 은자야, 잘 살았냐? 이 가시내야!”라는 화끈한 인사로 시작하는 김용택 시인, 내 고향이기도 한 경남 하동으로 떠난 박남준 시인,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돌아간 안도현 시인 등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냉장고의 술이 동날 때까지 얘기하고, 노래하고, 기타치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빗물처럼 받아 마시며 춤판을 벌이곤 했다. 박남준 시인이 은자언니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면 그 다음에는 곧 은자씨, 굿 치자!” 하는 말이 나올 차례. 그가 꽹과리를 잡고, 은자언니는 한쪽에 놓여 있던 장구를 꺼내고, 누군가는 주섬주섬 일어나 징을 손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난리굿판은 지구인이 우주로 띄우는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격정적이었다.“

 

고백하건대, ‘풍류의 장소성에 대해 말해보자는 과제를 전해듣는 순간부터 필자는 새벽강이라는 단어-장소 밖에 전주의 어느 곳도 달리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어느 누군들 제각기 취향과 교분에 따라 도시 어느 곳 한 군데쯤 단골 술집 두지 않은 사람 없을 테고, 세상 만물만사 넘나들며 어우러지는 한판 자리에(그것이 술판이든, 토론장이든, 음악회든 간에) 부지불식간 스며든 사연과 추억들 간직하지 않은 이 없을 테지만, 유독 필자에게 새벽강이라는 술집은 그야말로 풍류라는 말에 맞춤한 인물들과 그네들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인문적 삶이 넘실대는 장소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도 오고 해서 나 전주 나갈란다. 그리로 와, 새벽강.”

시인의 문자에서는 벌써 새벽 강가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듯 노란 누룩 냄새가 모락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터미널에 나가 전주 가는 버스에 올랐다. 비가 술주전자에서 술 떨어지듯 내리는 날이었다.

(중략)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치고는 길고 굵은 비였다. 그사이에도 술꾼 몇 팀이 바람처럼 새벽강에 이르렀다가 바람처럼 떠나갔다. 낮술부터 시작해 자정이 넘도록 이곳에 앉아 있자니 정말로 새벽 강어귀에 앉아 모든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듯했다. 이 나이에 이르러 이제 나는 다 안다. 삶은 실은 많은 허접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내 남은 생에 소망이 있다면 그중 무엇이 허접하지 않은지 식별할 눈을 얻는 것인데, 여기 새벽강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중 몇 개를 건져 올리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살아 푸르른 숭어 같았다.“

 

말마따나 전주의 모든 강은 새벽강으로 흐르, “2차 타임이 되면 작은 개천이 큰 강으로 모이듯, ‘맛있고 멋있는 전주 각계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들어 호탕한 음풍농월에 격정의 토로를 일삼아 한밤을 꼬박 지새우는 게 별것도 아니게 치부되는 곳이 바로 새벽강인 것이다.

그렇게 새벽강을 앞뒤 없는 풍류의 장()으로 새기게 된 연유야 셀 수 없이 많다. 필자의 경험만으로도, 진중한 삶의 철학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맛있고 멋있는데다 흥까지 넘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고 보아왔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전주 사람들이야 묻어두고라도, 경향 각지 풍류객들이 또한 차고 넘쳤다. 그에 더하여 자유분방하되 방탕하지 않은, 타성의 주색잡기가 아닌 투명한 정열과 신명의 놀이판이 언제든, 약속이나 준비 없이도 느닷없이 펼쳐지곤 했다. 그러니, 감히 새벽강은 풍류의 다른 이름이다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듯하다.

 

“‘새벽강이 새로 장소를 옮긴 지 어느덧 5년이 됐지만, 내가 사는 집에서 불과 20m 정도의 거리에 있던 두 번째 새벽강에 대한 추억이 유난히 짙다. 지금도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유대수 작가의 판화 <새벽강에는 은자隱者가 산다>에서처럼 트레이드 마크인 단발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의 은자언니가 항상 새벽강을 지켰다. 혼자 술 마시고 싶은 날에도, 혼자 술 마시기 싫은 날에도 나는 새벽강으로 흘러갔다.”

 

덧붙이자면, 두 번째 새벽강 터가 되어준 동문사거리-동문길이라는 곳이 어쩌면 시()()()()가 즐비한 전주-풍류의 본산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지금도 연극터는 굳건하고 책방골목의 명맥은 채 사라지지 않았다. 수제맥주에 인디밴드 공연이 겸상하는 모던-시크한 술집도 여럿 생겼으나 인심 푸진 막걸리집에 콩나물국밥집도 여전하다. 그보다 더 여전한 것은, 소위 예술문화자 두른 각양각색 인물들이 새로운 연대와 접속을 향한 클리나멘을 그으며 미끄러지는 유쾌한 분열자를 꿈꾸며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즐거운 탈주가, 문명의 속도와 관습의 위선에 지친 이 도시-사람들의 잠시 멈춤(pause)’을 위한 숨구멍으로, ‘멋스럽고 풍치 있게 노는 일의 마중걸음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한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파트와 대비되는 한옥마을의 전통적 생활양식은 이 지역에 문화 활동가와 예술가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요소가 된다. (중략) 다문잔치는 쇠락하고 있는 한옥마을을 문화 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새벽 늦게까지 떠들고 노는 도깨비같은 사람들은 점차 다문을 예술가와 문화 활동가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취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거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앞서 말한 새벽강과 함께, ‘찻집 다문’(이하 다문)산조축제역시 전주 문화지도를 작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기점이자 유쾌한 탈주를 시도한 풍류거점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전주한옥마을’(이하 한옥마을)이 씨앗으로 꿈틀거릴 무렵 전후로, 마치 삶의 일부처럼 풍류놀이로 일상을 노닐던 사람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사람이었다. ‘우리없이는 문화도 풍류도 없다.

 

필자 역시 이 시기 미술그룹 <작업실사람들>의 일원으로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한옥마을, 특히 찻집 다문을 드나들며 그 풍경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다문산조축제라는 두 키워드로 그 시절 한옥마을을 기억하곤 한다.

1998년 고사동 오거리를 떠나 한옥마을에 둥지를 튼 다문은 이동엽과 박시도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사랑모임활동을 바탕으로 월 1다문잔치를 여는 등 지속적인 문화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에 산조축제를 준비하고자 뭉친 박흥주 굿연구소 소장을 포함한 지역 예술인, 문화활동가들이 결합하고 뒤이어 마임이스트 최경식이 주도한 마임축제가 열리게 되면서 다양한 장르, 분야간 인적 교류의 폭이 넓어진 것은 물론 한옥마을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담론은 더욱 풍성해진다.“

 

필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르면, 다문이라는 열린 마당과 다문잔치라는 주기적 놀이판의 형성이 일상에 스며든 생활-풍류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다문에는 실제 풍류방이라 이름 붙인 두어 평 남짓의 공간이 있었다.), 산조축제는 일정한 구조와 규모를 갖춘 조직된 행사로서 풍류적 신명을 상호 공명, 공유하고자 하는 -풍류(또는 일종의 계회(契會)-풍류’)‘라 부를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전주 산조예술제에는 그렇게 연주자는 무당과 진배없는 예술가의 진면목과 함께 우리가 잃어버린 '놀이판'의 정신과 신명을 불러내는 굿판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안간힘을 보이고 있다. 오래 전 우리 민족의 장터에서 행해졌던 장인 정신 번득이는 광대와 그만한 듣는 귀를 가졌던 관객들이 자아냈던 ''의 회복을 꾀한다는 민족미학의 논리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문화 권력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요즘, 문화의 중앙 집중을 해소하는 실천적인 모습은 단순히 물량적이고 전시적인 행사가 아니라 전주 산조예술제와 같은 분명한 자기 성격과 지향을 가진 작은 노력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 중앙에서 지방으로 나눠주는 것이 아닌 지방 문화 주체들 스스로의 지향과 의지에 의해서 주체적으로 정립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산조축제는 그 자신 추구했던 바 판성의 회복이라는 기치 아래 산조정신을 발현한다는 예술축제로서의 목표에 머무르지 않고 축제가 발생하고 이뤄지는 현장, 즉 한옥마을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며 이의 실천에도 상당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문화 활동가 및 민간전문가들의 선도적 움직임은 단순히 낡고 구석진, 도시 발전의 저해요소로 여겨졌던 한옥마을에 내재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했으며 문화적 취향을 함께 하는 전주시민들의 발걸음을 한옥마을로 흡인시키는 활기찬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2. 도대체 풍류가 뭐길래

풍류라는 말은 매우 폭넓게 해석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며, 시대에 따라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는 바, 단정적인 경계를 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여러 연구와 문헌을 통해 속되지 않고 운치 있는 일이나 음악을 가리키는 예술용어또는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아취(雅趣)가 있는 것등으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풍류를 풍속의 흐름으로 보아 문화와 같은 뜻으로 보거나,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시가(詩歌)와 관련 짓거나, ‘자연과 인생과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삼매경에 대한 심미적 표현이라고도 한다. 심지어는 팔도강산을 유람하길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마치 신 들린 사람마냥 춤도 잘 추고, 사람들과도 두루 평화롭게 잘 어울리고, 말술을 비울 만큼 주량도 세면서, 마치 신선처럼 걸림 없는 삶을 사는 듯한 이태백 류의 인간형을 떠올리라는 예시가 있을 정도인데, 과연 작금 현실에서 그러한 인물이 존재할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운 한편 내심 마주침의 기대감이 일기도 한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지宗旨,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차여입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풍류라는 말의 연원은 신라 말기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에서 찾는다. 이 문장을 음미해보면, 결국 풍류란 접화군생(接化群生)’을 최종의 도달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음주가무는 물론이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멋이 있는 것, 음악을 아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 여유, 자유분방함, 즐거운 것등을 취하고 구하는 것 모두가 실은 접화군생을 지향하는 각고의 노력이자 연마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 민주식은 현묘지도(玄妙之道), 곧 풍류가 삼교를 포함하여 접화군생한다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면서 도 그 어느 것도 아니며, 삼교(三敎)가 신라에 전파되어 각기 그 나름대로 영향을 끼친 후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고유하게 있어 왔다고 강조하며, 우리 사상사의 원래적 줄기가 스스로 먼저 존재함은 물론 전사회적으로 인식 수준이 매우 깊었음을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 있다.

 

풍류도는 삼교의 단순한 종합형태가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성 발전되어온 민족적 종교사상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신라사회에 아무리 외래의 유도 삼교가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라문화의 표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문화의 심층을 차지하여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한 것은 풍류도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라인은 비록 외양으로 보기에는 유학자(儒學者)요 불승(佛僧)이요 도사(道士)로 행세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지향하고 있는 정신적 신앙적 이념은 풍류도였다.”

 

그밖에도 풍류의 역사적 의미와 용례를 찾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신은경은 풍류를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라면서, 중국은 주로 시문(詩文)’으로, 우리나라는 음악측면이, 일본은 에 관계되는 게 많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 이르면 놀이적예술적 요소가 ()’의 의미와 대등하게 부각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이 종교성이나 선풍적(仙風的) 의미는 상실한 채 경치 좋은 곳에서 연회(宴會)를 여는 것으로 일반화되며, 대개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풍류 행태이지만 뱃놀이, 가무, 낚시, 기생 등과 같은 잡기적 취미도 풍류의 요소가 되어 나타난다고 밝힌다.

이기동풍류는 하늘사상에 근거한다. 한국인의 정서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 중에 단군신화가 있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을 하늘로 설명한다. 하늘마음은 한마음이다. 한국인은 아직도 한마음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하늘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이다. 인내천사상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하늘이 하늘마음을 가지고 지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듯, 한국인은 한마음을 가지고 지상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여 하나로 융화시킨다. 그것이 풍류다. 풍류는 하늘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고상하다. 풍류는 지상을 초월해 있으므로 초월적이다. 풍류는 지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므로 포용적이다. 한류는 근래에 자주 오르내리는 새로운 조어로,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뜻한다. 풍류가 초월적이고 포용과 융합의 덕목을 갖추고 있으므로 결국 한류와 상통하는 개념이 된다.”라고 하며 고대 사상으로부터 오늘날 유행하는 문화적 흐름까지 일맥으로 연결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류도의 세 성격을 유동식(柳東植)은 고유한 우리말로 이라고 표현하였다. ‘에는 하나크다높다바르다하늘 등의 뜻이 있고, ‘에는 흥과 율동, 조화와 자연스러움, 자유와 내실 등의 뜻이 있으며, ‘에는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개념과 살림살이라는 사회적 개념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였던 삶의 이념은 풍류도와 통하는 한 멋진 삶이라 하였다.

이렇게 몇 가지 자료를 통하여 보면 고대의 풍류는 현묘지도라는 이상적인 우리의 도()이고, 고려시대의 풍류는 팔관회와 같은 행사를 통하여 나타나며, 조선시대의 풍류는 음악과 관련된 용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풍류의 개념이나 풍류의 본뜻이 완전히 음악으로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시 풍류스러운 생활이 있고 그러한 삶을 통하여 표출되었던 한 멋있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풍류는 멋, 즐거움, 예술과 자연의 음미와 교감 등 삶을 긍정적으로 가꾸고자 하는 낭만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에 반해 풍류라는 말은 종종 호사스러운 고급 취향의 뜻이나 남성 중심의 성적 자유로움이라는 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전달되기도 한다. 풍류남아식으로 좀 바람기가 있고, 돈 잘 쓰고, 겉멋 부리고, 타락한 듯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한편 그 사람은 풍류가 없어.”라든지 풍류를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하였다면, 멋도 없고 음악도 모르고 여유도 없는, 옹졸하고 감정이 메마른, 틀에 박힌 꽁생원쯤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삶에서 풍류를 행하고 풍류로 즐긴다는 게 현묘지도의 체득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3. ‘우리 식으로 놀기, 그리고 재현의 가능성

놀이판은 푸른 버들과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어느 정자인데, 여기서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산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이공로(李公老)이규보(李奎報)진화(陳澕)유충기(劉忠基)민광균(閔光鈞)김양경(金良鏡) 등이 모여 시를 짓고 중국 고전을 두루 읽으며, 제각기 글씨 자랑을 하고 있다. 잠시 후 황금주(黃金酒)백자주(栢子酒)송주(松酒) 등 온갖 좋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스스로 신선처럼 느끼고 있을 때 미희(美姬)들이 들어오고 이어 음악이 연주된다. 거문고와 대금중금가야금비파해금장구로 구성된 악대가 밤새 연주를 하고 꾀꼬리 같은 미희들의 노래가 어우러진다. 선비들의 전형적인 풍류모습이다.”

 

선비들의 전형적인 풍류모습이라는 위 인용문을 참조하자면, 현재까지 전해지는 여러 서책의 기록과 당대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풍류의 모습들 또한 대부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각설하고, 풍류를 즐기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이 꽤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나아가 판을 펼쳐야 할 자연 공간을 시작으로, 각자의 전문지식이야 당연지사, 시를 짓고 고전을 읊조리는 창의적 인문교양도 곁들여 필요할 것이다. 친구를 맞이하거나 홀로 고즈넉한 사색에 잠기는 경우를 제외하면 거개 여성의 등장 또한 필수인데다 음악과 술은 거의 고정출연이다(‘놀기위한 느긋함과 헐거움을 위한 장치로 짐작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야 이 모든 게 필요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풍경은 종종 일부 지배계급-양반들의 분별없는 한량문화로 변질되거나 현실과 유리된 유유자적의 선비문화로 굳어간 측면도 없지 않지만, 접화군생의 본질-근원을 지향하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으로서 풍류심은 현재까지도 여전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쌍방 호혜의 공동체성으로 다져진 기층민중의 삶 속에 스며든 풍류심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유동식(柳東植)멋진에 대한 욕구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계급과 계층에 상관없이 연연한 것이라 하겠다.

 

사람의 기능이나 능력보다는 인격과 인간미를 중시하는 대인관계에서도 우리는 풍류의 한 면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은 쟁이밖에 안 되었지만, 인격이 고상하고 품격이 훌륭한 사람은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고 존경을 받았다. 그러한 통념을 바탕으로 풍류라는 음악도 발달하게 되었고, 그 예술의 멋이 인격화하여 멋있는 사람을 좋게 보는 관념도 생겨나게 되었다. 정원을 가꾸고 난초를 기르며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갖추어놓은 서재에 거문고 하나쯤 걸려 있는 그 환경만 해도 풍류스럽기 그지없었다. 좋은 벗이 몇 쯤 찾아와서 국화주나 매화주를 마시면서 시를 짓고 담소한다면 더 더욱 풍류스러워지게 된다.

 

이제 눈을 돌려 전주를 생각해 보자. 어찌 보면 전주-식 풍류는 어떤 모습인지, 과연 있기는 한지, 있다면 다른 지역(?) 풍류와는 어떻게 다른지(동네마다 고스톱 규칙이 다르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에 대한 담론이 선행적으로 있어야 하겠지만, 기실 위에서 말한바 풍류를 즐기기 위한 필요조건들은 이미 우리 몸 안에, 주위에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놀이판을 마련할 의지, 놀이판에 지체 없이 나설 의지, 풍류심을 깨워 온 동네에 비춰줄 의지가 있느냐 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풍류의 의미를 실천할(하고 있는) ‘장소를 찾는 중이다. 전주 어디에서 풍류를 얘기할 수 있는가 둘러보는 중이다. 앞서 새벽강과 동문길, 다문과 산조축제에 대해 말했지만 이는 필자 개인의 경험일 뿐, 또 다른 경험, 또 다른 공간과 행위들이 없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앞선 시기, 사람들이 모여 들던 곳이 어디였나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전주팔경이 우선 아닌가 한다. 다가사후, 한벽청연이 특히 그렇다. 앞서 필자가 임의로 구분한 생활-풍류적 의미로 본다면 전북예술회관 근동을 비롯하여 남부시장 매곡교 밑, 싸전다리 밑, 경기전 모퉁이의 장기마당, 덕진공원 등이 떠오른다. 물론 구도심 곳곳에 포진한 막걸리집이나 가맥집들, 라이브카페들이야 두말 할 것도 없다.

더불어 요즘 들어 하고 하다고 할 만한 곳이 있다. 남천교-청연루. 이미 히트상품으로 자리한 한옥마을 입구인 장점도 있겠지만, 날 풀리는 봄부터 가을 언저리까지 남천교 청연루에는 밤마다 젊은 여행객들과 시민들로 북적이기 일쑤다. 어느 때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몇몇씩 무리지어 둘러앉아 하염없이 담소를 나누고, 사진을 찍다가, 길 건너 편의점 캔맥주와 배달음식에 행복해 하며 승암산 물그림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가끔 들려오는 버스킹 노래에 귀 기울일 줄도, 앵콜을 외치며 박수칠 줄도 안다. 더할 나위 없다. 낭만적인 전주 남천의 밤.

마찬가지로 -풍류식 장소성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일견 영화제, 소리축제, 한지축제, 비빔밥축제 등 굵직한 이름들이 새겨지지만, 그 우렁찬 잔치마당에 끼어들어 흐드러지게 놀아 볼 풍류-돗자리는 어디에 깔려야 마땅할지, 경험되어 인식될 장소의 마련은 과연 가능한 것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한발 더 나가보면 최신의 문화 경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유행하는 음악경연 프로그램 중 하나는 하필 제목이 풍류대장이다. 할로윈과 크리스마스, 달마다 끊이지 않는 00데이는 추석보다 설보다 왁자지껄하게 만나고 또 신명나게논다! 풍류는 이제 그런 식으로 소비된다.

MZ세대들의 놀이는 인스타와 틱톡 업로드와 팔로우 경쟁에 집중된다. 대화는 카톡과 스토리 댓글라인으로 이루어지고 음성통화는 돈을 갈취하려는 사기수법에 더 많이 사용된다. 메타버스 캐릭터는 중년들도 흥미롭게 놀이 삼는 판이다. 한류의 첨병 BTS에 이날치마저 한물 갈 판이다. 다가올 미래의 풍류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정리되고 기록될 수 있을까.

그렇다. 작금 현대문명은 속도사회다. AI로 대변되는 매끈한 결론 중심의 사회다. 문자 그대로 3차원 부감시점이 일상화된 드론사회다. 넘쳐나는 첨단기술의 잔치 속에서 자기과시에 몰입하는, 나의 행복을 내가 감각하는 게 아니라 행복해보이도록 치장한 가상의 자신을 타인이 감각하게 만드는, 버추얼-나르시시즘의 사회에 다름 아니다.

사람의 온기를, 감정을, 진지함을 온전히 느끼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대면하여 눈빛을 읽고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눈치 챌, 작은 마당의 삶이 사라졌다. 그러니 문제는 여전히 사람이다. 사람이 모여야 풍류심도 드러나고, -놀이가 실천되고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또는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해야 그 장소로 인하여 삶이 경험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를 잇는 상호간 의식의 포섭과 환대, 교류와 공명의 성숙이 이뤄질 그런 장소성의 확장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게 있다면, 소재주의적 공간의 위치와 규모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들을 모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부터 마련해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삶의 풍류심, “타성적인 관습과 기성의 고루한 규칙을 거부하며 열린 태도로 멋과 흥을 즐기고 뭇 생명을 신명나게 만드는 삶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풍류객들의 만남. 도시에서 풍류를 깨우치며 논다는 것. 여전히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