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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

20160425-문화-정책과 예술-기획의 사이(전라일보)

by PrintStudio86 2017. 7. 26.

20160425 칼럼[전라일보]

문화-정책과 예술-기획의 사이

유대수/화가, (사)문화연구창 대표



취중진언에 언중유골이라 했던가. 왁자한 술자리 잡담의 어느 틈바구니에 앞뒤 없이 내던져진 말들이 종종 오래 매달려온 추상의 화두에 접근해볼 만한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할 때가 있다. “문화는 자꾸 제도화되고 예술은 점점 도구화된다”고, 한탄도 비평도 아닌 채로 슬쩍 치고 빠지는 누군가의 정리가 그런 경우다. 한편으로는 명쾌한 직설이라는 동조의 끄덕임이 자리 잡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제법 익숙한 현장 감각을 내세우며 그저 그런 레토릭(rhetoric)에 불과하다고, 그런 줄 이제 알았느냐고, 가볍게 치부하여 넘겨버리기도 하는, 그런 경우-들.


여기서 동조의 경우는 제도‘화’와 도구‘화’의 과정과 속도에 대한 실제 경험(또는 증거 가능한 사실의 확보)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한 것, ‘정상적이지 않은’ 것에 속해야 한다. 치부의 경우는 어떨까. 여기서는 사회 일반의 조건들이 이미 정상적이지 않음을 근거로 문화-예술의 원래적 의미와 가치의 문제들을 드러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정상적인’ 쓰임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은 같은 말이다.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여하한 경우든, 동조든 치부든 간에,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담론이 그 자체로 외부를 향해 발언되거나 내부를 향해 심화되지 못하고 사회현상 일반의 유통 측면, 곧 생산과 소비라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다루어지며 공회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슬픈 일이다. 덧붙여 문화와 예술이 분별없이 동일시되거나 문화-정책의 성립에 예술-기획의 생산성이 일방적 공급주의에 무차별로 노출되는 경우, 그 지점이 바로 제도적 시선이자 도구화의 감각임을 눈치채는 순간은 조금 더 안타깝고 한발 더 가슴 아픈 일이다.


결국 문화도 예술도 우리 사회의 공자전 궤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을 터임을 익히 안다. 그럼에도 자율-자생의 문화적 항상성은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하리라는 압박은 왜 거부되지 않는지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예술의 범위에서야, 결론적이라 할 ‘지금, 여기, 세계에 대한 측정’의 과제를 한참 벗어나 냉정한 현실의 스펙타클에 둘러싸여 욕망 실현의 계량기가 되어간다는 사실(!)은 왜 성토되지 않는지 대단히 불만스럽다.


이상은 끊임없이 유보됨으로써 현실을 연명하게 한다. 역설적으로 현실은 지속적으로 이상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제도의 구축이 문화-성의 효율적 운영과 관리의 문제에 초점이 있다면 그때에 효율성은 도대체 어디를 향한, 누구를 위한 효율성일까 자못 궁금하다. 예술-성의 도구적 활용 역시 마찬가지 의문을 품게 한다. 유치하게 빗대자면, 절차적 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통합과 절충의 합의를 통과하면서 개괄된, ‘개론화’된 서술을 강령 삼아 그 이상이나 이하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유전적 행태를 이미 각인해버렸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돌아가, 제도화하는 문화를 재-문화화하려 하거나 도구화되는 예술을 재-예술화하려 하는 시도들은 어느 곳에서 출발되어야 하는지 궁금해진다. 정상적이지 않은 사회, 그늘진 세계의 이면에 웅크리고 앉아 언중유골의 취중진언이 가없이 쏟아진들, 현재하는 문화에 대한 투덜거림과 아직 상상되지 못한 예술의 진부함에 대한 손가락질이 제 아무리 넘쳐난들, 무엇으로 첫 단추를 삼을 것인가의 깊은 회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멈추어 서서, 여기 문화와 예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므로 제도적 정책과 도구적 기획 역시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