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사람, 생명의 목판화
김진하/전시감독,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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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블록버스터 판화의 세계 "나무, 그림이 되다"展
# 1부 국토: 김준권, 류연복, 김억, 정비파, 손기환, 홍선웅
# 2부 사람: 정원철, 이태호, 유근택, 강경구, 이동환, 이윤엽,
# 3부 생명: 윤여걸, 유대수, 안정민, 배남경, 김상구, 강행복
- 기간: 2021. 5. 4(화)~ 30(일)
- 장소: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전관
- 주최: 예술의 전당 / 한국목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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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는 한국적 특성이 강한 매체라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자연에 대한 동양적 세계관으로 인해서 그럴 수도 있고, 목판인쇄문화의 뛰어난 역사적 전통으로 인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고려의 팔만대장경 등에 이르기까지, 목판인쇄술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이자 가장 발달한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이런 목(활)판인쇄문화의 뛰어난 문화산업은 조선 세종 시기 세계최초 금속활자인 직지 발명의 자양분과 토대도 된다.
인쇄술과 함께 목판화의 전통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목판인쇄에 그림을 등장시킨 목판화는 A.D 868년 중국에서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 변상도가 처음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두 번째가 고려시대인 1007년에 제작한 불경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의 책머리 변상도다. 그리고 이런 인쇄술과 목판화의 전통은 고려-조선의 불경과 유교 경전, 기타 여러 생활물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우리의 인쇄 문화를 빛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한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빼어난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런 전통의 바탕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목판화를 우리 고유의 것이란 관념으로 느끼거나, 더 적극적으로는 실체적 문화로 인식하게 되었으리라.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는 불교와 유교 학문과 서책을 숭상하는 선비 문화의 바탕에서, 능화판 표지처럼 일상생활에 유용한 생활공예로서의 실용적 기능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 것이고.
근대 개항기의 석판·활판·마스터·옵셋 등의 일본을 통한 서구적 인쇄기계 및 기술의 도입과 근대적 출판산업의 활성화로 인해 그 수명을 다한 듯 여겼던 목판화는, 그러나 1950년대 후반 순수미술 장르로 그 정체를 변주하며 재등장하게 된다. 서구에서도 근대부터 독자적 양식으로 독립했던 목판화의 표현적 특성이 우리나라 화가들에게도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개항기-일제강점기-해방공간-한국전쟁기를 통해 출판미술로 간간히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58년 한국판화협회의 창립을 통해 본격적인 현대미술의 한 장르가 된 것이었다. 물론 이때까지도 목판화의 형식은 여전히 고전적이고 아카데믹한 범주에 있는 것이었지만, 당대 여러 화가들이 자신의 주요한 표현매체로 활용함으로 비로소 순수미술로 그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현대 인쇄술에 의해 이미 그 효용이 다한 목판화였지만, 화가들의 표현미디어로 선택된 순간 다시 현대미술로 되살아난 질긴 생명력이었다.
한국현대목판화는 1950, 60년대의 모색기-1970년대의 도약기-1980년대의 활황기를 거쳐서-1990년대 이후 동시대와의 접점을 찾는 2차적 모색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2021년 지금 목판화작가들의 다양한 작업궤적으로 타 현대미술 장르와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목판화 고유 기능인 출판미술로서도 괄목할 만한 결과물을 생산해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시점의 우리 목판화는 그 예술적 수준과 형식에 있어서 세계적으로도 가장 독자적이면서도 훌륭한 지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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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그림이 되다 : 국토·사람·생명전은 새로운 밀레니엄 이후 현재에 이르는 한국 목판화의 새로운 도전과 개념에 대한 미학적 자기점검이자, 앞으로 국제적으로 진출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탐색의 의미도 갖고 있다. 이 말은 스케일·기술·목판화 개념·지향성·미적 태도·작가마다의 독자적 표현성과 기술 등에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을 위시한 서구 작가들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당대성과 목판화의 한국적 장르개념과 미감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 전시의 외형을 보자. 형식적으로는 표현력을 중시한 대형판화, 판화의 원본성을 확대해석한 가변설치, 목판화의 원형적 기능인 출판미술, 그리고 각 작가마다의 개성적인 기술과 어법 등의 형식적 다양성을 최대한 수용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작업 경향과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 파트로 구성했다. 1부는 국토 LAND, 2부는 사람 HUMAN, 3부는 생명 LIFE이 주 소재이자 주제다.
이 바탕에서 전시 전체가 바라보고자 하는 지점은, 코로나로 인해 글로벌리즘의 축소 시기에 목판화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웃·그리고 생명존중에 대한 근원적 자기성찰이다. 이는 타국이나 타자와의 단절과 폐쇄를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삶에 대한 반성적 돌아봄과 성찰의 윤리학이다.
지난 세기말 새로운 밀레니움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20여 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의 팽배, 코비드19 창궐이나 후쿠시마 핵재앙 같은 재난, 미얀마를 비롯한 도처에서의 정치·종교·인종 갈등과 살육으로 인류 스스로가 초래한 디스토피아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거기에 덧붙여서 대기오염, 지구온난화에 따른 북극과 남극의 빙하감소, 쓰나미와 같은 환경재난은 또 어떤가. 인류로 인해 지구가 위기에 봉착해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분단된 우리 국토, 여타의 개발과 산업재해로 인해 우리의 자연환경 모두가 생명성을 위협받는 심각한 상태에 처해있음 또한 우리는 안다. 이런 현실에서 목판화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터인 국토에 대한 재인식, 이웃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연의 순연한 생명력을 다시금 느끼고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그게 과해지는 국뽕의 지점은 물론 조심해야 하겠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 전시는 국토·사람·생명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국토는 장르로 보자면 풍경화다. 풍경이되 풍경예찬의 심미적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근대 이후 인류에 의해 재조립된 자연은, 자연 고유의 능동성을 인간에게 빼앗겨버렸다. 인위가 조립한, 자연으로 보자면 주체가 아닌 인류의 타자로써의 수동태 풍경인 셈이다. 자율적 아름다움을 상실한 자연. 이 타율적 가공이 바람의 동적인 움직임, 즉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적 이미지인 풍경風景과 산수山水의 의미와 개념을 거세했음은 물론이다.
우리 국토도 마찬가지다. 개항기-일제강점기-한국전쟁-분단시대와 개발산업시대-관광시대를 거치며, 국토의 전략적 참호화·산업국토와 개발국토·부동산 광풍의 국토·운송수단과 관광의 일상화를 위해, 온갖 도로와 기반시설로 성형된 국토는 본래의 몸과 얼굴을 잃어버린 기형이 되었다. 그런 역사적·물리적인 가해·자해의 풍경을 극복하는 게 국토에 대한 바른 인식이자 예의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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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국토 LAND에 초대된 작가들은 모두 다른 형식과 양식과 어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관통하는 태도는 앞서 말했던 국토에 대한 가해/자해의 현상을 극복하면서, 국토를 현재뿐 아니라 과거-미래로 연속되는 항구적 시간성의 터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초대형의 작품 안에 자신만의 감수성과 표현법으로 상징화한 내용을 장쾌한 장면으로 압축해냈다. 거기에 서사와 서정, 감성과 형식을 아우르는 미적 형식들이 오롯하다.
한국 산하에 대한 정서를 조형화·전형화하려는 김준권(1955~)의 수묵水墨목판화는 철저하게 나무판면이라는 평면성을 수용하는 감성적 기호의 세계다. 판면에 칼을 터치하면서 나오는 판각版刻 Cuting 과정의 칼맛보다는, 인출印出 Printing 과정에서의 담묵과 농묵, 투명과 불투명, 형태와 묘사 등을 아우르는 환원적 이미지로 국토의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을 고요한 마음의 기호로 전형화한다. 수묵목판화로는 국내 유일의 작가다.
정비파는 백두대간과 지리산맥을 호쾌한 거대풍경으로 모두어냈다. 실사풍경과 관념산수의 조형법을 한 화면에서 버무리며, 대관적 다시점으로 구축한 광활한 국토풍경과 판각법의 예리한 조응이 두드러진다. 거기서 빚어지는 대작목판화의 맛은 그야말로 우리 역사를 장엄하게 풍경으로 환유한다.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화엄의 세계로 젖어드는 이미지가 참으로 단정하다.
풍경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 삶의 터인 국토의 공간성,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동시에 조응하는 서사적 역사성을 판각으로 형상화한 김억은 이름 그대로 국토 작가다. 한반도 허리 아래와 북쪽 요동까지 답사하며 풍경과 민중의 역사성을 국토문예학적 입장에서 담아냈다. 과거-현재-미래를 두루 엮으면서, 국토가 어째서 민중을 담는 그릇인지를 부감법으로 조망했다.
민중적 힘이 서린 듯한 단호한 칼의 기질적 운행에 바탕해서, 분단에 감응하고 현실을 사유하는 류연복의 작업은 강인한 민중적 생명력을 전유해낸다. 그러나 그 바탕은 서정적이고도 아련한 서민의 한과 생명력의 정서다. 질기고도 강인함, 유연하고도 고즈넉한 정서가 어울리며 류연복만의 서정성과 서사성을 담지해낸다. 그 국토는 나무를 단칼 판각하는 칼잡이인 류연복 자신의 몸이자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손기환은 풍경風景의 개념보다는 전통 관념적 미의식인 산수山水를 차용하며, 서구적 풍경화장르에 대한 역설로 강박산수라는 심리적 개념성의 작업을 진행한다. 산수의 관조성이 사살당한 분단현장의 수동적 풍경으로 분단상황을 은유한 것. 액티브한 칼 맛의 표현성과 풍경화 장르에 대한 역설적 사유가 잘 직조된 결과물은 매우 동적이다.
역사적 사건과 현장을 오늘의 삶과 기억으로 중첩해서 가시적인 풍경에 인식적으로 접근하는, 사람과 현장풍경이 혼연일체가 되는 홍선웅의 작업은, 전통적 목판화의 간단명료한 기법과 칼질과 형태감을 수용한 것이다. 우리 전통목판화의 담백한 조형성으로부터 과거와 당대 역사의 레이어를 하나의 풍경에 몽타주해냈다.
이들 모두 국토풍경의 소재적 공통점은 있으나, 그 목판화의 작업양상과 발언법은 각기 다른 독자적 개성들이다.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법, 판각법, 칼맛, 찍어내는 방법, 내용을 풀어가는 어법, 그리고 드러나는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르다. 이는 이들의 지난 30년 이상의 지난한 작업궤적이 도출해낸 우리 국토풍경목판화의 경지이자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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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사람HUMAN은 근대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인물과 동시대 이웃들의 살아온 이야기, 즉 인물을 통한 서사적 형상성이 주를 이룬다. 사람의 생명력만큼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사람마다 살아온 이력이 다르고, 각자마다 모질지 않은 견딤이 없다. 숱한 소설이 사람의 이야기이듯이 이 목판화 작업들도 위대한, 혹은 소소한 이력의 스토리텔링을 수용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세세하고도 리얼한 민중사다. 역사적·현실적 사건과 팩트에 관계된 인물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시각적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작가 고유의 체질과 칼질, 발성과 표현성,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 이웃의 삶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수성 등이 버무려지면 얼마나 끈질기고도 강인한 생명력을 도출해낼 것인가. 더불어 그런 생명성을 억누르는 힘에 자동적으로 거역하는 비판성도 자동으로 생산해낸다. 사람 이야기만큼 직접적이고, 또 공감의 폭과 깊이가 넓고도 깊은 게 별로 없으니까. 공감의 폭이 큰 상태에서 작가들마다의 조형적 표현성이 제공하는 목판화를 통한 사람이야기의 맛과 멋은 깊은 울림을 제공한다.
2부는 그런 목판화 장르의 미디어적·형식적 너비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 인간에 대한 존엄-이웃에 대한 공경-역사적 자각-능동적 삶에의 의지를 구현하는 인물상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모두가 다른 소재와 기법을 구사하되 전체적인 지향성은 공통적이다. 우리시대 목판화에서의 사람에 대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전형화되는 것이며, 동시에 총체적으로 공동체 삶을 인식하는 존재론의 바탕이기도 한 것이다.
강경구의 자화상을 비롯한 공재 윤두서·표암 강세황·소정 변관식 초상의 대형 판각을 보자. 이 작품들은 찍어낸 판화가 아니다. 조각도로 찍어내듯 칼질을 한 나무판이다. 나무판에 직접 가한 거친 표현성과 물리적 나무질감의 물성으로 인물의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한 작업이다. 동양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초상미학을 목판에 적용시킨 실험이다. 부조로 판각한 나무판의 육질감이 빚어내는 거친 물성과 인물의 이미지가 압축된 정신성으로 도드라진 회화적 표현성을 확보한다.
판화계와는 별 상관없이 목판화란 매체의 소통을 위한 미디어적 활용도에 개념적으로 접근한 이태호의 거리미술작업은 독자적이고도 새롭다. 시각적 주목성을 위해 선명한 이미지의 목판화 기법을 차용해서 김수영·전태일·김원봉·백남준·코로나와 사투하는 무명의 간호사·이육사 등의 초상을 목판화로 제작하고, 이를 길거리에 붙이는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다. 일상적 현장성으로 우리 목판화의 품을 넓히는 실천적 작업이라 하겠다.
이동환은 독립운동가인 장준하와 이회영 일대기를 이야기체 판각으로 형상화한 출판미술을 선보인다. 이중 돌베개는 이미 출간된 그림책 형식의 출판물이고, 이회영 일대기는 내년 출판을 위해 현재 판각대장정 중인 작업이다. 작가 특유의 물리적 힘에 기반한 칼의 거칠고도 깊은 구사와 대하서사적 서술성이 어울리면서, 선각자들의 일제강점기 항일투쟁과 자유를 향한 정신을 드라마틱하게 극대화한다.
유근택은 소설가 임철우의 한겨레신문 연재소설 <우리사이 강이 있어>(2003년)에 목판 삽화 255점을 판각하고 연재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목판화로서는 가장 많은 소통 창구를 열었던 셈이다. 이 삽화작업과 더불어, 독립적인 작품이자 목판화 실험작으로 전시하는 인물목판화 연작에서의 다양한 표현적 시도와, 그 결과인 미적 긴장도와 회화적 완성도도 주목할 부분이다.
한편 정원철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의 초상화를 정교한 칼맛의 리놀륨판화로 구현했다. 그리고 이를 대형 설치작업과 여타의 질료로 번안하면서 할머니들에 대한 위로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권성을 비판적으로 부각시켰다. 우리 근대사에 대한 반성과, 보편적 인권에 대한 성찰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우리 현대목판화의 소중한 성과다.
소탈한 형상의 이웃이 등장하는 목판화를 시위현장에서 투쟁의 무기로 선택해서 활용하는 이윤엽의 작업은 매우 직접적이다. 각종 재개발현장·용산참사현장·구럼비 저항현장·밀양송전탑 반대운동현장·김진숙의 고공농성현장 등 박해받고 소외받는 이웃의 투쟁현장을 찾아 목판화작업으로 함께한다. 그의 배제된 이웃 Homo Sacer을 향한 동지애와 현장성과 전투성은, 목판화를 통해서 우리이웃에 대한 애정이자 인간일반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을 구현하는 예술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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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생명LIFE은 그런 국토에서의 사람과 조응하는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와, 겸허한 사유와, 순수한 감성과, 관조의 미적 세계다. 각기 다른 목판화의 조형적 스타일이 여러 방법론과 더불어 전개되면서 기법과 재료의 범주를 넓혔다.
사람과 여타 원시적 생명체들과 자연이 뒤엉키며 공존하는 윤여걸의 카오스는 지난한 생명력의 능동성에 대한 숭고랄까, 현실적인 억압이나 제약에 대해서 투쟁을 할 때 더 빛나는 원초적 존재, 즉 살아남은 생명의 의지에 대한 오마쥬다. 사람·동물·여타의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평화로운 어울림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다.
유대수의 생명은 자연을 관조의 대상이자 화두로 삼은 삼매의 경지에서, 자연과 자아와의 관계성을 수행적 태도로 형상화한 심상풍경이다. 일종의 선禪적인 요소로 자아와 세계의 통일, 물아일여의 깨달음과 같은 상태를 간구하며, 생명에의 경건한 희구와 깨달음의 과정을 목판화 작업과정으로 상징화했다.
안정민은 쉼 없이 내리꽂히는 폭포처럼 늘 깨어있는 인식적 태도로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해인海印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 그 몰아沒我의 생명현상으로 작업을 대행한다. 그것은 일종의 현상학적이고도 근원적인 자기 확인이자, 실리콘이라는 새로운 재료와 판화문법을 통한 자기수행법이기도 한 그런 것이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풍경들은 결국 그의 내면을 담는 거울이라 하겠다.
나무를 소재로 해서 경건한 생명성과 담백한 조형성을 통일시키는 김상구의 소탈한 판화문법도 충만한 빔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 형태로 환원시킨 나무는, 대상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라 자연의 기호다. 리듬·운동·생성의 기표이기도 하고. 철저한 조형적 평면성으로의 이 회귀는, 결국 꾸미지 않는 자연미학에 다다르려는 김상구의 미적태도의 담백한 결과물이다.
그런가하면 배남경의 <새·옷·춤·빛>이라는 문자도 형식의 간결한 이미지가 이끄는 맑고도 순수한 한글연작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판화작업을 환원시킨다. 결과에 이르기 위한 수십 회의 찍기 과정을 통해서 한지에 스며든 옅은 발색의 미적 프로세스는, 이미지의 순연한 생명성에 작업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작가관과 생태적 자연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강행복의 대형 설치작품은 반복된 패턴, 그러나 같은 이미지는 하나도 없는 A4크기의 한지 목판화 약 600여장을 평면과 입체로 연이어 설치하면서 영성적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어떤 서사적 소재나 서술조차 없이 오로지 조형적이고도 추상적인 이미지의 반복과 설치만으로, 목판화라는 작업행위가 가질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성에 대한 진지한 화두를 화엄華嚴의 그릇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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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전시 1, 2, 3부를 가로지르는 가로축은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의 생명론적 존재론이고, 세로축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갈등을 염두에 둔 정치적(현실정치가 아니라 예술적 알레고리의 영역) 극복에 대한 메시지다. 쉽게 말하자면 국토·사람·자연 모두 분단이라는 폭력·인위적 생태파괴·뭍 생명들의 죽임을 극복하려는 물활론적 생명성을 지향한다고 하겠다. 국토(풍경)-사람(역사)-생명(자연)이라는 구체성과 추상성의, 리얼리즘적 주제성과 관념적 조형성의 어울림이자 대비이기도 하다. 적어도 우리 안에서의 이런 조화로운 어울림 정도는 있어야, 차후에 한반도의 평화를 순연하게 맞이할 자격이 있지 않을 것인가. 미술은 그런 움직임의 시각적 지표이고, 작가는 그를 실행하는 존재이고, 목판화는 그런 양식의 동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장르다. 이처럼 21세기의 목판화는 과거와는 다른 적극적 양식으로 우리 삶에 능동적으로 동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매체개념·작업형식·내용·타자와의 소통에 이르는 모두가 말이다.
목판화는 미술의 여러 장르나 표현 매체 중 하나다. 그러나 거기에 담기는 소재나 내용의 보편성과 함께, 관객이 누리는 소통기능의 장점이 추가되면 그 효과가 증폭되는 적극적인 미디어이기도 하다. 본래 그래픽과 일러스트의 감성적 서술 기능으로 출발했으되, 작가의 고유한 미적 세계를 담보하는 순수미술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그 장점은 훨씬 더 넓어졌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0~60년대 순수미술 작업으로 등장한 이후, 70년대 현대적 언어를 모색하는 시기를 거쳐, 80년대 사회운동으로 큰 역할을 했던 우리 목판화는, 그러나 90년대 이후 미술전반에서 상업화가 팽배하면서 화단변방으로 위리안치되었다. 투자대상으로 이윤 창출이 어려운 판화작품의 복수성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디지털 미디어의 활황으로, 수공의 노동력에 기인하는 목판화는 좀처럼 동시대적 담론과 미학을 확보하지 못하는 듯 여겨졌다. 한동안 목판화의 활동이 축소된 이유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시기에도 여전히 작가들은 살아있었다. 땀과 노동으로 묵묵히 나무판을 깎고 찍으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결과물로 쌓아왔다. 거대한 대작으로, 수백여 종류의 이야기로,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리고 예술혼으로. 이는 목판화가 특정한 장르적 범주에 묶이지 않고, 작가 개인적인 표현매체인 퍼스널미디어라서 가능했다. 아울러 사회적인 영역에서 실용적으로 응용되면서 소통기능을 확장하는 디자인·공예·일러스트이자, 정보전달 매체인 매스미디어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개입하고 또 기능하는 장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순수미술의 개별성과 사회(산업)적인 역할을 아우를 수 있는 매체. 이 점이 타 미술장르와 달리 목판화만이 갖출 수 있는 독특한 매체적 가능성과 장점이다. 여기에 목판화미술의 열린 장르적 가능성과 드넓은 사회적 활용성이 있다. 그 근거를 제시하는 게 이 전시를 기획한 이유다. 순수미술의 형식과 내용적 담론에서 출발하고 있으되, 기실, 이 전시는 목판화의 원형이 변주하면서 어떻게 기존 장르적 카테고리를 깨고 좀 더 당대적으로 넓혀갈 수 있는지에 대한 모색을 그 근저에 담고 있다. 작가들이 이정도 열정과 노력으로 작품 수준과 미학과 미감의 최대치를 제시했으면, 이제는 여기서부터 파생되고 다양하게 응용되는 미감의 공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순서다. 문화적·산업적 시너지 효과를 확보할 수 있는 목판화의 문화인프라 정책·기획·비평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현재 진행형인 한국현대목판화의 수준은 매우 높다. 목판화 강국인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미학적·형식적 개성이 두드러지고, 서구의 그것에 비해서도 독자적인 내용과 다이나믹한 미감을 확보했다. 지난 40여 년간 우리나라 목판화가 굴곡과 직진으로 성취한 장점이자 강점이다. 다만 중국에 비해서는 작가의 숫자가 적고, 일본의 일상생활에 응용되는 디자인이나 공예적 측면에 비해서는 아직 활용도가 낮다. 따라서 작가들의 목판화 미학과 개념의 적극적 모색과 함께, 여러 기획의 전략적 다변화와 전술적 응용이 필요하다. 수준 높은 목판화의 미의식에 기초한 일상에서의 활용은, 타 미술장르에 비해 문화산업화가 가능한 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참가한 작가들은 모두 나름의 형식과 내용적 주제를 안고 오랜 기간 작업에 천착해왔다. 치열한 뚝심이 그 밑바탕이되, 무엇보다도 자기만의 날카로운 목판언어·감각·개념으로 작업의 뼈대와 근육을 구축했다. 이들이 목판화로 말하는 우리 삶의 터와 역사와 존재론적 성찰이, 어떻게 감성적 결과물인 이미지로 우리에게 전유되어 오는지를 느껴보시라. 어떤 선험적인 슬로건이나 외침보다 진하고 깊은 그들 몸의 궤적과 노동의 결과물인 목판언어들이 웅숭하게 전달되어 올 터이니. 국토와 사람과 뭍 생명의 조화로움도 함께. 바로 그때 우리 국토에서 모든 존재들이 생명의 어울림을 노래한 목인천강지곡木印千江之曲이 천개의 강에 비추고 울려퍼질 것이다. 이 어찌 목판화라는 예술적 매체를 통한 화엄세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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